세 명은 같은 날, 한 곳에서 딸을 잃었다. 인천 중구 인현동 화재참사에서다. 이 일로 모두 57명이 숨졌다. 기자는 희생자 유족인 김윤신 김영순 김폰삼 씨와 이야기를 나눴다.

화재는 1999년 10월 30일 오후 7시 쯤, 4층짜리 상가건물의 지하 1층 노래방에서 일어났다. 희생자 대부분은 2층 호프집에 있던 고등학생이었다. 이들이 대피하려고 하자 당시 호프집 관계자는 돈을 내고 가라며 문을 잠갔다. 이 때문에 학생들이 불길과 연기 속에 갇혔다.

김진선 양의 아버지 김윤신 씨는 딸이 갑자기 사라진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했다. 다른 유족도 같은 심정이어서 인천시와 중구에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장례를 거부했다.

의류업을 하던 김 씨와 병원 직원이던 김 씨 아내는 일을 그만뒀다. 1년 정도가 지난 뒤에 딸의 장례를 치렀다.

▲ 김진선 양의 사진. 왼쪽 아래는 당시 신문

김 씨는 치킨집을 시작했지만 오래하지 못했다. 허리 수술을 받으면서 오토바이 배달을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아내가 순댓국 조리법을 배워 식당을 열었다. 2년이 지나도록 손님이 늘지 않았다. 한 번만 버티자는 생각으로 1년을 더 하니 형편이 나아졌다.

순댓국집은 올해로 16년이 됐다. 인기가 많아 식사시간에는 손님이 줄을 선다. 밖에 대기 손님을 위한 의자를 놓을 정도. 김 씨는 어린이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좋다고 했다. 그래서 식사를 마치면 사탕을 하나씩 준다. 딸을 떠올리는 듯 했다.

가게 일로 바쁘지만 아픈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딸 이야기를 하는 날이면 술을 마셔야 한다고 했다. 식탁 한 쪽에 약이 보였다.

딸에 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다. 부부끼리도 쉽게 꺼내지 않는다. 너무나도 가슴 아픈 기억이기 때문이다. 아내가 거실에서 울면 김 씨는 자리를 피해 방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누구한테 이야기를 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지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어서 더 괴롭다. 사고가 있고 얼마 안 됐을 때는 친구들도 같이 슬퍼했다. 이제는 듣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다른 유족을 만나야 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인천시는 유족의 심리치유에 무관심했다. 김 씨는 장례를 치르고 나자 시청, 구청, 교육청 담당자가 면담을 점점 회피했다고 말했다. 김 씨는 유족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 김윤신 씨가 딸의 유품을 보는 모습

이지혜 학생의 어머니 김영순 씨는 다른 유족과 달리 정부의 보상을 받지 못했다. 딸이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사고를 당했다는 이유였다.

“한 달에 15만 원 있으면 어떨까?” 딸의 말에 무심코 “15만 원 있으면 좋지”라고 대답했다. 김 씨는 그 말이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려는 말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참사 이후에 딸이 그 곳에서 일했음을 알았다.

김 씨는 딸이 “아빠 없이 살았어도 밝았다”고 기억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유는 넉넉지 않은 살림에 도움을 주고 싶어서였다. 김 씨는 가난한 형편 때문에 딸이 사고를 당한 것 같아 가슴이 찢어진다고 말했다.

김 씨는 2001년 인천시, 중구, 호프집 주인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했다. 그러나 법원은 인천시와 중구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법원은 인천시와 중구청 소송비용을 김 씨가 부담해야 한다고 선고했다. 김 씨는 더 이상 인천에 살고 싶지 않아서 경남 김해로 이사했다.

김 씨는 “우리 지혜만 구천을 떠도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한 억울함 때문으로 보였다. 그는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의 위령비 앞에 앉을 공간이라도 제대로 마련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스토리오브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