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최선열

'DJ에게'는 80년대 중반에 크게 히트한 노래였다. "그 노래만은 제발 틀지 마세요"라고 디스크자키에게 애원하는 호소력 있는 유행가였다. 말 그대로  DJ는 판을 틀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음악다방이나 라디오에서 음악을 틀어주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던 낭만적인 DJ가 머지 않아  옛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디지털 기술혁명이 DJ에게 믹싱이라는 새로운 활동영역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신세대 DJ 들은 이제 디지털 녹음기술을 활용하여 마음대로 노래를 해체하고, 뒤섞고, 정교하고 현란하게 합성할 수 있게 되었다. '디스크자키의 월권이다', '음악을 파괴하는 반문화적 활동이다'라는 논쟁에 대해 '믹싱 자체가 창작활동'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이 믹싱 기술이 음악판 뿐만 아니라 정치판에도 도입된다니 걱정이다. 정치인 DJ 는 사실 DJP라는 이상한  메들리판으로 97년 대선에서 힘겹게 히트를 쳤다. 이 판에는 60년대의 새마을 노래, 70년대의 국민가요, 80년대의 저항적인 운동가요, 90년대의 랩, 그리고 세월과는 관련없는 나른한 사랑 노래들이 뒤죽박죽 섞여있다. 조용해야 할 바닷가, 산속 휴양지에서 질 낮은 스피커로 크게 틀어대는 이상한 가요 메들리, 가끔 택시 속에서도 억지로 들어야만 했던 지루한 가요 메들리처럼 DJP 메들리는 누구에게나 듣기 거북했다. 그런데 여기다가 신곡들을 추가하고, 편곡을 새롭게 하면서 최고의 믹싱 기술로 새 판을 낸다니…. 결국 정치판은 DJ의 믹싱 기술로 잡동사니 노래들이 마구 믹싱된 새 판으로 나올 모양이다.


소위 '젊은 피', '신선한 피'로 불리우는 명망있는 신인들이 DJ의 새 판 만들기 유혹에 넘어가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들도 우리처럼 자신들의 신선한 목소리와 창법이 이 믹싱 판에서 살려지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가요무대'급 가수들의  백댄서나 백코러스에 머물게 될텐데 무엇 때문에 그 판에 뛰어 드는가? '젊은 피 수혈론'으로 가시화된 정치판의 '새 판 만들기' 움직임은 많은 사람들을 정치에 대한 극심한 냉소주의에 빠지게 하고 있다. 그럴 듯하게 들리던 "국민의 정부"라는 말도 무척 공허하게 들린다. 결국 우리나라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나라가 아닌 노정객들의  정치의, 정치에 의한, 정치를 위한 나라임을 비참하게 확인하게 된다. 도대체 왜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춘 유능한 인재들이 정치판으로 가야한단 말인가. 참신하고 유능한 시민운동가, 영화예술인, 환경운동가, 여성운동가, 언론인, 법조인, 교수들은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우리 사회를 위해 할 일이 많은 사람들이다. 확고한 신념과 소신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젊은 피'니 '신선한 피'니 '수혈'이니, '신지식인'이니 하는 말장난으로 유혹하여 정치로 끌어낸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총선 때마다 그 당시로서는 참신한 인재라는 사람들이 정치의 유혹에 넘어갔다. 그들은 지금 다 어떻게 되었는가. 스스로 개혁적이고 진보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지금의 이 반개혁적인, 비진보적인 상황에서 왜 말이 없는가. 결국 총선 때마다 '수혈된' 인재들은 노정객들의 정치쇼의 들러리를 하다가 소리없이 무대 뒤로 사라졌거나, 보호색을 잘 활용하면서 정치생명을 연장하고 있거나, 노골적으로 뻔뻔스러운 정치꾼이 되었다. 각 전문분야에서 존경받는 원로들이 많지 않은 우리의 현실이 바로 정치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던 인재들이 정치에 의해 뿌리 뽑혔기 때문임을 인식해야 한다.   


'장수무대'니, '노인정치'니, '후 삼김'이니, '새 피'니, '나쁜 피'니 하는 냉소적인 말의 홍수 속에서 모두들 정치를 우습게 보고 있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차라리 정치를 더 우습게, 더 냉소적으로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는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야망과 유혹을 낮추어 줄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정치하는 사람들을 정말 싫어하게 되고 거부하게 만들 것이다. 물론 지나친 냉소주의가 탈정치 사회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나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를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의 표로 연결시킬 수 있다면 생산적인 정치발전에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지금은 정치에 대해 마음껏 비웃는 거다. 그리고 총선과 대선에서 우리 유권자의 힘을 보여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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