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이끌 50인을 주목하라'
95년 11월 22일, 서울신문은 창간 50돌을 맞아 정치,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의 인사 50인을 선정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쟁쟁한 인물들이 거론됐다. 이미경 의원(한나라당, 전국구)은 문화예술계 인사로 소개되었다. 당시 그는 한국여성단체연합을 이끌고 여성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는 이병헌(연기자), 신경숙(소설가), 조덕현(서양화가), 백혜선(피아니스트) 등과 함께 신문의 한 지면을 차지했다. 그러나 지금 그를 문화 예술계 인사로 소개할 신문은 없다.

당론이라는 이름으로 거수기가 된 국회의원들

얼마전 이미경 의원은 다시 한번 유명해졌다. 지난 4월 29일 노사정위법 통과 투표에서, 당론을 어기고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그 일로 징계도 받았다.

  
-당론과 소신이라는 문제는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일부에서는 당론을 어긴 것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는데요.
"저는 이번 일로 질책과 격려를 동시에 받았어요. 일부에서는 '당원으로서 당론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비판하기도 했죠. 실제로 당론이냐 소신이냐의 논쟁이 네티즌 사이에서 벌어졌을 때, 젊은 네티즌들이 의외로 당론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DEW를 웹진이라 소개하자 네티즌 이야기부터 꺼낸다. 젊은이들이 당론을 고집하고 나왔다는 것에 대해 놀란 눈치였다. 사람들은 당론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 현실에서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당론과 소신은 어찌 보면 양쪽이 다 옳은 진실일 수 있죠. 이 문제는 그 사회의 상황을 고려해야 해요. 정당인으로서 당론을 따르는 것이 기본적으로 옳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치현실을 고려하면 그렇지만은 않은 거죠."

당 지도부에 이의를 제기하면 '항명'으로 간주되고, 지도부의 명령에 따라서 일괄 투표를 해야 하는 국회의원들. 때에 따라서는 일괄 사표를 제출하기도 한다. 민주화가 가장 안 된 부분이 정치다. 이런 현실에서 그는 소신이 필요하다고 삐딱이를 자청했다.
"당론이라는 이름 아래 당리당략에 따라 정치를 운영하면 국회의원들은 하나의 거수기로 전락하고 말아요. 국회의원들이 어떤 법안을 통과할 때 고민할 필요가 없어지는 거죠. 이번 안건(노사정위법)의 경우는 한나라당 내에서도 충분히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어요. 단지 정치적인 문제(고승덕 후보 사퇴 파문) 때문에 중요한 사안을 뒷전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어요."

-작년 전교조법안 통과 때도 당론을 따르지 않았는데, 끝까지 소신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제 정체성 때문이죠. 저는 저의 정체성을 운동의 연장선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정당의 당리당략 보다 국민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지요. 일차적으로 같이 운동했던 동료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고, 아직도 그들과 깊은 교류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 의원님의 소신과 배치되는 한나라당에 계속 남아있는 것도 모순 아닐까요.
"저는 현재의 정치를 독재 대 민주의 투쟁구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구도 속에서라면 아마 정치에 들어오지 않았겠죠. 만약 그런 상황에서 현실정치에 발을 들여 놓았다면 보수 진영에 서지 않았을 거예요."

사실 그는 한나라당으로 정치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여성단체연합을 이끌 당시 그는 여성들의 정치참여를 위해 뛰어다녔다. 여성 의석 20% 관철을 주장하며 여성할당제 도입을 위한 연대모임을 이끌기도 했다. 여성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그는 96년 총선 때 민주당에서 전국구의원으로 공천 받았다. 57%에 달하는 여성유권자를 고려하고, 여성계의 의견을 수렴한다는 이유로.

"당시에 개혁적이라고 평가되던 민주당으로 시작했는데, 민주당이 신한국당과 합당하는 바람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거죠."
두당의 합당이 이루어지던 97년에 이미경 의원은 이수인, 김홍신 의원과 함께 신한국당과의 합당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전국구의원의 경우, 탈당을 하면 의원직을 박탈당한다.
"그 때 의원직을 계속 유지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고민했어요. 저는 의원직을 계속하는 것을 선택했죠. 정책으로 유권자들에 대한 도리를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독재 대 민주의 투쟁이 아닌 상황에서 정책으로 제 책임을 다하려고 했죠."

그의 의정활동은 정치에 입문하기 전의 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 94년 여성단체들은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를 주장했다. 정치에서 여성의 권익을 대변할 사람이 필요했다. 여성단체를 이끌던 이미경 의원이 그 역할을 자청했다. 국회에서 정신대 문제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발로 뛰며 국회의원들의 서명을 받아내기도 했다. 출입국 관리법을 개정하여 일본군 전범의 입국을 금지시켰고, 가정폭력방지법, 범죄 피의자의 인권보장 등 그의 활동은 여성, 인권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의정활동에서의 활약과는 별개로 단지 당론을 어겼다는 것만으로 "탈당하라", "해당행위다"라는 극한 비난들이 쏟아졌다. 

내년 총선 때도 한나라당으로 출마할 생각입니다
 
-의원직에 연연해서 탈당하지 못한다는 비난도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이미 이 의원님의 마음이 한나라당을 떠난 것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하는데요.
"소신있는 의원이 탈당해야 한다는 것은 무기력하고 '예스'만을 말하는 사람만이 당에 남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죠. 그것 자체가 정치가 얼마나 경직화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는 약간 흥분했다. 자신의 노력을 사람들이 몰라주는 것 같아서 화가 난 듯하다. 남성위주의 권위주의적 정치풍토에서 타협하지 않으려는 모습은 기득권층에 곱게 비추어지지 않았다. 이미경 의원은 거기에 도전했다. 자신에게 어떤 결과가 되돌아오리라고 예측하지 못했을 리 없다. 정치뿐 아니라 여러 영역이 획일화된 한국사회에서 거수기임을 거부한 그의 모습은 그래서 반갑다.
"다른 의견이 존재한다면 토론을 통해 해결해야죠. 단지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흑백논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에요."
    
-내년 총선 때의 계획은 어떠세요.
"저는 정치를 계속 할 겁니다 . 현재 한국의 여성의원들 중 재선, 삼선한 의원은 하나도 없어요. 이것이 우리 여성들이 해결해야 할 벽입니다. 여성이 정치권에서 발언권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도 경력있는 정치인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여성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정치를 계속해야 하는 것을 제 책임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 의원에게는 아직 할 일이 많다. 4년동안 열심히 뛰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에 대한 불평등 해결을 위해 할 일이 남아있다. 그러나 요즈음의 그는 외로운 처지다. 해야 할 일은 많지만 내년 총선 때의 계획은 사실 불투명하다. 당지도부로부터 미운털이 박힌 그가 공천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현재 조건이 좋은 편은 아니에요. 하지만 가능한 방법을 찾고 있어요. 내년 총선 때도 한나라당으로 출마할 생각입니다."
 
국제의회연맹(IPU)에 가입한 130개국 중 112위. 한국의 여성의원 비율 순위이다. 여성은 정치에서 들러리로 취급된다. 그나마도 기존 정치판을 답습하곤 한다. 그래서 소신있는 의원을 자처한 그가 미덥다. 나즈막하지만 확고한 그의 목소리에서 여성 정치의 희망이 보인다면 지나친 기대일까.   

김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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