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복도에서 두 사람이 똑같은 말을 했다. "딸이에요." 한 사람의 목소리는 빠르고 활기차고 큰데, 다른 한 사람의 목소리는 느리고 기운이 없고 작다. 듣는 이는 아마 한 사람은 딸을 얻어 기뻐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딸을 얻은 것을 섭섭해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중3 국어교과서에서 '어조'를 설명하기 위해 예로든 표현이다. 오늘도 어느 중학교 복도에선 "딸이에요."를 활기차게 한 번, 기운없이 한 번씩 외치고 있는 목소리가 들리겠지?


내가 중3일 땐 미처 몰랐다. 국어책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는지. 중3때 뿐만이 아니라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무슨 책에 무슨 내용이 숨어있었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단지 달달 외워 시험만 잘 보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러나 4년이 지난 지금, 난 과외를 하며 교과서의 무서움을 깨닫는다.
알게 모르게 주입되어 있는 가부장적 논리들. '자강불식하는 남성적 이미지', '여성스런 문체'...

내가 중3이던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한 건 없었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와 '상록수'가 아직도 소설 단원에서 애용되고 있는 것도 그랬고, 여전히 재미없는 내용들로 국어책이 채워져 있다는 것도 그랬다.
'유홍준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 남도기행 부분이 실렸다는 게 우리 세대 교과서와 다른 점이랄까? 그러나 난 옛날 국어책이 오히려 진보적이었다는 느낌이다.

얼마전 과외 시간이었다. 교과서 96쪽, 토론하기 단원을 가르치고 있었다. "토론이란, 의견이 서로 대립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하여 참가자들이 각기 자기의 의견이 옳다고 주장하는 말하기 방식이다."라고 교과서에 실린 정의를 읽어주고, 그 옆 페이지의 학습활동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한 페이지를 가득 차지하고 있는 토론 주제란? 다름 아닌 '여성의 사회진출'이었다. 아, 여성의 사회진출이 아직도 '의견이 서로 대립할 수 있는 문제'였구나!

더 얄미운 것은 참고서에 실린 모범 답안이었다. 그들이 반대의견으로 제시한 내용을 보았다.

①여성의 역할은 가정에서 발휘되어야 한다.
②자녀 교육에 소홀해 진다.
③상대적으로 남성의 일자리가 줄어든다.

교과서를 만든 이들의 의도적 선택이었을까? 수많은 토론주제 중 왜 이런 주제여야 했는지 의심스럽다.
상황이 재미있었던지 한 문제집 회사에서는 이를 가지고 장난도 쳤다.
한샘 국어문제집 73쪽 7번 문제는 '문열'이와 '지영'이가 '여성의 사회진출'을 가지고 토론하는 내용을 지문으로 썼다.

결국 국어책을 만든 어르신들은 '문열'이를 '선택'하신 모양이다. 교과서 연구진으로 참여한 사람 중엔 여자 중학교 선생님도 있던데, 그 선생님은 열 다섯살의 제자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헛된 꿈 꾸지마. 너흰 기집애들일 뿐이야.' 설마 이런 생각을 하진 않았겠지? 8종 교과서도 아니고 '교육부'에서 만드는 책에 이런 내용이 실렸다는 게 씁쓸할 뿐이다.

                                                                                                   박내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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