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ologue 1

처음으로 느낀 것은 따스함이다.

# prologue 2 : 19790606                                                               


"여보, 나 임신 두 달이래요."
"어 그래?"

아빠는 티를 내면서 크게 기뻐하지는 않는 성격인 것 같다. 내가 태어난 날, 너무너무 귀여운 나를 직접 보고 나면 얼마나 좋아하실 지 궁금하다. 아, 그러고 보니 친할아버지도 외아들이고 우리 아빠도 외아들이다. 내가 여자라는 걸 알게 되면 좋아하실까, 싫어하실까. 아무래도 아들을 더 바라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런 거야 어쨌건 간에, 지금 여기까지의 나를 있게 한 건 열 할이 엄마와 아빠다. 내가 여자애인 것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니라는 말씀. 여기에서 지낸 시간도 어느새 두 달이 넘어간다. 이제 파릇한 초여름이고, 날은 제법 화창하다.

# prologue 3 : 19791027

"박정희 대통령 서거 ...... "
"뭐라구요?"

아침 신문을 펴든 아빠의 첫마디는 이상하게 착 가라앉아 있었다. 서거라는 것이 무슨 단어인지는 잘 몰랐지만, 엄마가 곧 틀어본 TV 화면에는 향이 피어오르는 단지가 가득했다. 나도 제사를 지내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지만, 제사와는 좀 다르게 상 위에 까만 띠를 두른 커다란 사진이 놓여 있었다. 비장한 톤으로 낮게 깔리는 음악은 머리카락이-아직 없는 건가-쭈뼛 서도록 음산하고 어두운 기분이 들게 했다.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암살이라니. 거 참, 막판 독재에다 유신만 선포하지 않았어도 이 사람 끝까지 영웅 대접을 받았을 텐데 말이야."
"어유, 영웅은 무슨 영웅이에요. 올해 또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 알아요?"
"허긴 여자들은 물가에  민감하겠지만서도. 그래도 박통 덕에 나라 경제는 확실히 발전하긴 했으니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나 무언가 아쉬운 것이 남아있는 사람이나, 결국은 깨끗이 물러나야 할 때를 확실히 알아야 하는 건데 말이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제일 짠한 건 자제 분들이지, 뭐. 대통령이야 여사님 만나러 갔을 테니 좋지 않겠어요. 참, 이런 틈을 타가지고 빨갱이들이나 넘어오는 건 아닌가 몰라."
"이제는 뭔가 달라질 테지, 유신 시대의 종말이니."

엄마 아빠의 대화 사이로 주인집 아줌마가 울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서 사진 앞에 꽃을 놓고 절을 했다. 오후에는 엄마랑 주인집 아줌마랑 동네에 임시로 생긴 분향소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 후로 며칠 동안은 '추모 음악, 추모의 밤, 추도 음악회, 위대한 생애, 님은 정녕 가십니까, 명복을 빕니다' 같은 추모 특집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만화영화나 연속극이 몽땅 중지되었고, 그래서 유일하게 방영하는 재미없는 소공자를 대신 보아주어야 했다. 이제는 대통령을 할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들 슬퍼하는 걸까? 내가 생겨난지 이제 일곱 달 정도가 되었는데도, 세상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 prologue 4 : 19791212

새벽에 잠이 깼다. 다시 잠이 오지는 않아서, 이젠 세상에 나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조금은 두근두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우르릉 하는 굉음이 온몸에 진동했다.
우리 집 근처로는 이른바 노태우 사단이 서울로 진입하는 큰 길이 있었는데, 그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탱크의 체인, 캐터필러가 땅을 찍으면서 도로를 눌러대는 소리가 무시무시하게 들려왔다. 큰 소리에 놀란 엄마와 아빠도 곧 일어났는데, 아마 동네 사람들도 거의 다 깨어났을 거다. 점점 커지는 거친 소음에 겁이 나서 나는 뱃속에서 빙글빙글 돌며 무서움을 달랬다.
 
그러다가 몇 번 발길질이 세게 나갔을 때, 엄마는 배를 쓰다듬으며 달래는 말투로, "얘가 군화를 신은 건가, 뱃속에서 탱크를 굴리는 건가. 응? 우리 아들이 나중에 장군이 되려나 보지." 하셨다. 나는 찔끔해서 금새 멈추었다. 난 여자애란 말이에요!
탱크 소리에 겁먹은 귀여운 딸내미에게 그런 무지막지한 언사를 하시다니, 아들로 오해한 것도 모자라서. 확, 여자로 태어나 당당하게 군화를 신고 탱크를 굴리며 대통령이나 돼 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장군이 될 아들보다 내가 더 자랑스러울 텐데. 딸 대통령 하나가 열 아들 장군 안 부럽다는 말씀.
 
# prologue 5 : 19800109

나가는 길은 좁고 숨이 막혔다. 엄마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빨리 나가고 싶었는데, 벌써 출발한지 여섯 시간이나 지나버렸다. 내 얼굴이, 온 몸이 완전히 새빨개진 게 느껴진다.
아아, 아빠는 어디서 뭘 하고 계신 거야. 엄마가 이렇게 아픈데. 그리고 나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작고 동그란 흰 빛이 보인다. 저것이 내가 향하고 있는 세상이리라. 이렇게 고생해가며 나를 내보내면서 엄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와앙!"
"후, 수고하셨습니다. 딸이네요."

                                                                                                    조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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