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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피가 말하는 늙은 피 퇴진론
DEW | 승인 1999.06.01 00:00

내가 '대통령'이라는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마도 노태우 전대통령이 '보통사람'을 외치며 대통령에 당선될 때 였던 것 같다. 그것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요란하게 치루어진 대통령 선거를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내게 대통령 선거는 반장선거 보다 더 중요한 관심사였다. 부모님께 "엄마랑 아빠는 어떤 사람 찍었어?"라고 궁금해 하며 물었던 기억도 난다. '보통사람'이 당선된 것이 어린 나의 눈에는 아주 민주적인 일로 보였다.
 
김영삼 전대통령이 집권할 때도 그랬다. 노태우 대통령을 5년이나 봐 와서인지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군인이 아닌 사람도 대통령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호감을 갖게 했다. '민주투사'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 그 말에서 오는 믿음이 있었다. 물론 5년 뒤에는 그런 생각이 없어졌지만.


요즘의 초등학생, 중학생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내가 어렸을 때 대통령을 향해 가졌던 기대감을 그들도 가지고 있을까. 이 기대감이라는 것은 나라를 잘 이끌어 달라는 기대감과는 약간 다르다. 그것은 '대통령=완벽하게 훌륭한 사람'이라는 등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기대감이다. 
   
어린 시절 나는 대통령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고, 만약 현재의 초, 중학생들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빨리 버리라고 충고해주고 싶다. 잘못된 환상만큼 후일 상심이 큰 것은 없으니까.


전직대통령들의 말싸움

최근 전직 대통령들의 행보를 보면서 어린 시절 내가 가졌던 대통령에 대한 환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던가를 여실히 깨닫고 있다. 서로간에 헐뜯는 모습은 정말 보기 민망할 정도다. 그들의 움직임을 보는 일은 대단히 재미있는 일이다. 피할 수 없는 정치적 라이벌 의식이라고나 할까. 마치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을 보고 있는 듯 하다.

전직 대통령들의 갈등은 김영삼 전대통령이 4월 초 경남 통영시를 방문한 자리에서 김대중 현대통령을 '독재자'로 규정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후 전두환 전대통령이 김 전대통령을 향해 '주막강아지처럼 짖어댄다'고 공격했다. 주막강아지가 어떻게 짖는지는 잘 모르지만 듣기에 좋은 소리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거기에 국민회의 측에서는 '나라 망친 지도자'라고 비난했고, 노태우 전대통령은 집필하고 있는 회고록을 통해 '후계자로 세운 것 국민 앞에 죄송하다'며 비난에 합류했다. 이에 김 전대통령은 전 전대통령에게 '양민 학살자'라고 응수했다.이들간의 갈등 양상을 살펴보면, 김영삼-전두환의 갈등을 축으로 노 전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김 전대통령 비난에 동조하고 있는 형세다. 김 전대통령이 '왕따' 당하는 형세. 독재에 대항하는 민주투사의 외로운 모습이다. 

정치재개를 위한 계산된 행동

전직 대통령들의 말싸움을 물고 늘어질 필요는 없다. 솔직히 그들에게서 미국의 카터 전대통령과 같은 퇴임 후 활동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기대해보았자 뻔하다는 걸 체험하며 자랐다. 그리고 그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수록 한국 정치에 대해 상심만 늘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냥 그들도 사람이니 충분히 서로 헐뜯고 비난할 수 있다고 가볍게 넘겨버리면 훨씬 속편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넘겨 버릴 수 없다는 데 있다. 최근 전 전대통령과 김 전대통령의 행보를 살펴보면, 정치 재개를 위한 움직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을 '독재자'로 규정했다. 국민들은 당연히 화를 냈다. IMF 사태의 주역이 이런 소리를 하다니.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얼마 전 부산방문에서 그는 현정부의 주요직을 호남이 다 차지했다며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김 전대통령의 속셈은 이런 것이 아닐까? 영남지역 민심을 유도하고, 지역 차별하는 현정권에 대항할 반대자의 위치를 차지하려는 속셈. 그렇지 않고서 야당인 한나라당이 있는데 정부 비난에 전직 대통령이 앞장설 필요는 없다. 내년 총선에서 측근들을 대거 영남지역에 출마시킨다는 말이 있다. 김영삼 전대통령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도 총선을 위해서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전두환 전대통령의 경우도 김 전대통령의 경우와 거의 유사하다. 둘이서 짜고 행동하기라도 하는 건지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다만, 비난의 화살을 김영삼 전대통령에게 더 많이 날리고 있다는 것만 다르다. 김 전대통령이 영남지역 텃밭을 위협하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5공신당설'이나 '보수대연합'은 이미 사실로 굳어지는 듯한 인상이다. 도대체 전두환 전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궁금하다. 자신이 김영삼 대통령에 견줄만한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걸까? '그때는(전 전대통령 집권당시) 좋았지'라는 부풀려진 여론을 순진하게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나 보다. 아니면 자신을 감옥에 보낸 김영삼 전대통령을 '주막강아지'로 비하하고 '오역죄'를 뒤집어 씌우기만 하면 자신의 전과가 사라지는 줄로 아는 모양이다.

5공이 어떤 세력인가. 12·12, 5·16으로 이미 역사의 단죄를 받았고, 온갖 부정축재를 자행하던 자들이다. 그들이 정치를 한다니, 웃지 않을 수 없다. 더 재미있는 건 내년 총선에서 국민들이 그들을 외면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코미디배우 같은 대통령들

불행하게도 전직 대통령의 정치재개는 성공할 것만 같다. 지난 대선 때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자민련과 연합했던 국민회의는 다음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이들과 연합할 지도 모른다.
물론 전직 대통령들이 정치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훌륭한 사람'이었으면 하는 어릴 적 바람과 달리, 정치판에서의 그들 모습은 블랙코미디속에나 등장하는 잔꾀 많고 비열한 사람의 모습이다. 자라나는 새싹들이 성인이 되어 나와 같은 실망을 경험할까 걱정이다.

최근 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전대통령을 재평가했다. 기념관 건립 사업도 정부에서 돕는다고 한다. 한때의 적을 용서하고 그의 공을 인정하는 이 아름다운 광경. 테마게임의 주제로도 손색이 없다. 정말 기발한 생각이다.
아무도 영남지역 민심을 잡기 위한 방법으로 그런 생각을 해내진 못했을거다. 대통령들의 잔꾀에 찬사를 보낸다. 이제 대통령들은 평생을 사용해온 머리를 쉬게 할 필요가 있다. 더이상 국민들에게 코미디를 선사하기 위해 고심할 필요도 없이 말이다.

전직 대통령들의 정치재개가 성공한다면 더 많은 코미디들이 펼쳐지겠지. 그런데 벌써부터 지루하다. 이제 비슷한 레퍼토리의 코미디계를 은퇴하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할 때다. 전직 코미디언인 심형래를 보라. 코미디를 그만두고 얼마나 성공했는가.

대통령들도 코미디를 그만두고 신지식인으로 거듭 태어나길 바란다.

 김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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