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60302

유치원 운동회 이후론 처음 가보는 국민학교다. 이제는 어엿한 국민학생. 개근상 트로피를 들고 유치원을 졸업한 게 바로 한 달 전인데, 정말 세월은 빠르다. 엄마는 내가 학교에 가는 걸 계속 신기해했다.

"쟤가 벌써 학교엘 가네. 또 금방 시집 가겠다고 그러겠어."

설에 입었던 한복을 입었는데 아무래도 불편하다. 추운 운동장에서 교가랑 '우리들은 1학년, 어서어서 배우자' 같은 노래를 배웠다. 집에 돌아오니 밥상 위에 문제지들이 한가득 널려 있었다. 엄마는 날카로운 눈으로 하나하나 체크해가며 문제지를 넘겼다.

"엄마, 이게 다 뭐야?"
"음 머리표 아이템풀, 이건 공문수학, 이건 일일학습, 또…."
"…나 다 해야 하는 거예요?"
"엄마가 좀 보고, 뭐가 제일 좋은지 알아야지."

아아, 어머니. 제일 좋은 건 집에선 책을 보고, 바깥에선 동생들이랑 친구들이랑 뛰어노는 거라구요! 팔랑거리는 문제지는 싫어∼.

# 19860705

"아, 이런 바보같은 일도 있네."

신문을 보던 아빠가 카, 하고 무릎을 쳤다.

"아빠 왜요왜요? 뭔데요."
"몇 년 전에 KBS에서 이산가족 찾기 했었잖아. 그런데 잘못 찾았던 사람이 있네 이거."

알고 보니 북한에 있는 줄 알았던 동생은 유괴되었던 거라고 한다. 유괴되었던 동생이 30년도 더 지나 형을 만났는데, 그 형은 이미 다른 사람을 동생으로 알고 호적에 올려버렸다. 그런 것쯤 진짜 동생으로 다시 고치면 되겠지만…. 그럼 이산가족인 줄 알고 펑펑 울면서 상봉해버린 아저씨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럼 진짜 형제가 아닌 사람은 도로 이산가족이 된 거네."
"뭐 어쩔 수 없지. 안됐지만 다시 찾아야지."
"헤에. 그래도 몇 년 동안은 형제였는데."

졸지에 다시 이산가족이 되어버린 박종수 아저씨는 불쌍하지만, 그래도 몇십 년 만에 진짜 형제를 찾은 두 사람에겐 행복한 일이겠지. 유괴되었어도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 19860909

"개구리 소년 빰빠밤 개구리 소년 빰빠밤 니가 울면 무지개 동산에 비가 온단다- 일곱 번 넘어져도∼ 아, 아빠! 다녀오셨어요!"

동생과 한창 개구리 소년 노래를 따라 부르며 '다음 이 시간'을 기약하는데 아빠가 들어오셨다. 회사에서 돌아온 아빠에게는 언제나 뽀뽀를 하는 것이 이 집안의 분위기. 세 딸들이 한 줄로 서서 차례대로 다녀오셨어요, 하며 볼에 뽀뽀를 한다. 오늘따라 아빠도 기분이 좋아보인다.

"너희들 한강 안 갈래, 한강?"
"한강엔 왜요? 놀이기구도 없잖아."
"이번에 유람선도 여덟 척이나 생기고, 보트랑 요트도 수십 척이 떠다니게 됐거든."
"와, 배다! 배 타러 가요!"

그러니까 한강종합개발계획이라는 게 4년 만에 완료됐다고 한다. 엄청나게 넓은 공원도 생기고 배도 떠다니고. 강에 배가 떠다닌다니 정말 기대가 된다. 어렸을 때 여수에 있는 이모네 놀러가서 가만히 멈춰 있는 거북선을 타본 이후로 처음이다. 우리는 아빠를 졸라서 떠밀 듯이 집을 나섰다.

"우, 한강에서 썩은 냄새가 나."

해가 질 무렵 유람선에서 바라본 강물은 신기하고 예뻤지만 지저분했다. 보트랑 요트 말고도 쓰레기가 동동 떠다녔다. 뱃전에 서서 코를 막고 있는데 네 살짜리 둘째 동생이 다가와서 소매를 잡아끌었다.

"언니, 빠다코코낫이 떨어졌어."
"뭐야, 넌 방금 한강오염을 저지르고 만 거야. 더 더러워질 거야."
"환경오염이겠지."

웃. 아빠는 가만히 계세요. 떨어진 빠다코코낫은 물에 퉁퉁 불어서 썩어버리고 말 거다. 물고기라도 살고 있다면 먹어주겠지만, 아무래도 물고기가 살기엔 힘들 것 같은 한강이다. 무지개 동산도 아닌걸.

# 19860925

며칠 전부터 우리 나라에 온 세상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고 있다. 지구는 둥그니까∼ 그런데 요전에는 공항에서 폭탄이 터지기도 했었다. 아홉 명이 죽고 서른 명이 다쳤는데, 북한이 아시안 게임을 방해하려고 한 짓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만화에만 나오는 줄 알았던 시한폭탄이 정말 사람을 죽이다니 무서운 일이다. 하긴 정말 만화라면 폭탄이 터지기 5초 전에 멋진 아저씨가 나타나서 멈춰줬겠지만.

텔레비전에서 매일 틀어주는 달리기나 리듬체조, 스케이트 같은 경기 때문에 만화가 중단되는, 말도 안 되는 일도 있었다. 그렇지만 운동 경기도 볼 만 했다. 특히 달리기에서 금메달을 세 개나 딴 춘애언니! 몸집도 작고 예쁘지도 않지만 세상에서 제일 빠른 달리기 선수다. 저번 운동회 달리기에서 여덟 명 중 8등을 했던 나는 언니가 너무나 부러웠다.

"엄마, 나도 춘애언니처럼 라면 먹고 맨발로 뛰면 운동회에서 일등을 할 수 있을까?"
"임춘애는 라면을 먹고 싶어서 먹은 게 아냐, 돈이 없어서 밥을 못 먹은 거지. 라면이 뭐가 좋니!"

그렇지만 사실 라면이 밥보다 맛있는데. 나도 달리기를 잘 하고 싶단 말입니다, 엄마!

# 19861102

온가족이 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재미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고 있는데 아빠가  "그거 아나?"하면서 갑자기 무서운 말을 꺼냈다.

"북한에서 금강산 댐이란 걸 만들고 있는데, 그게 터지면 서울이 다 물에 잠긴대."
"앗 아빠, 그렇지만 여긴 아파트 10층인데(올 봄에 이사를 왔다)!"
"10층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 북한에서 맘만 먹으면 서울은 물바다야."

나는 숟가락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어리석은 동생들은 아무 생각 없이 밥만 잘도 먹는다. 엄마조차도 태연하다.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던져준 아빠는 오히려 즐거운 표정이다. 어째서 이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다들 떠내려가면 어떻게 하지? 물에 휩쓸리면 다시 만나기도 어려울 텐데. 북한 사람들은 왜 그런 짓을 하는 걸까.

잘 시간이 돼서 둘째와 같이 자는 방으로 들어왔다. 동생은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걱정을 하느라 잠도 안 왔다.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우선 장롱에 처박혀 있는 튜브를 꺼내서 바람을 넣었다. 통통해진 튜브를 이부자리 옆에 놓아두고 이번에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떠내려가지 않게 해주세요."

그리고 잘 가지고 놀던 엄마 드레스의 허리끈을 몰래 가지고 와서 내 손목에 묶었다. 끈의 한쪽 끝은 의자 다리에 묶었다. 이렇게 하면 떠내려가지는 않을 거다. 이 의자는 우리 집에서 제일 튼튼한 나무 의자니까. 또 남은 손으로는 쿨쿨 자고 있는 동생의 손을 꼭 잡았다. 자, 이제 나는 무적!

조혜원 기자<dewed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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