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신문 만드는 일을 했지만 아직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글을 쓰고 신문을 만든다는 건 언제나 도전이고 벅찬 일입니다."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중앙 일간지 사장 자리에 오른 장명수(張明秀.57). 그는 핵심을 찌르는 날카로운 내용의 '장명수 칼럼'으로 우리에게 더욱 친숙하다. 그의 글은 사회를 바라보는 넓은 안목으로 스쳐 지나가기 쉬운 일상에서 보석을 건져 올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칼럼니스트로서 이처럼 확고한 자리 매김은 그를 한국 언론 사상 최초의 여성 주필이라는 위치에 올려 놓았고 '장칼'이라는 별칭도 붙여 주었다.

63년 견습 기자로 입사해 36년간 신문 만드는 일에 몸을 바쳤지만 그에게 '신문'은 여전히 풀기 어려운 숙제와 같다. 그래서 요즘도 아침 5시에 눈을 뜨자마자 신문 펴드는 일로 하루를 시작해 여러 신문을 비교해가며 배우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 이제는 세상의 흐름을 파악하고 소재를 찾던 칼럼니스트가 아니라 한국일보가 서야 할 자리를 모색하는 사장으로 그 역할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사실 그에게 기자라는 직함이 붙은 건 여고 시절 때부터다. 이화여중에 입학하던 날 이화여중·고의 학보인 <거울>을 받아보고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이화여고에 진학해서 <거울>의 기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1기로 입학해서도 1학년 때부터 졸업 때까지 학보 만들기에 매진했다. 학교 수업보다는 취재가 우선이어서 지금도 성적 얘기엔 자신이 없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고 한다. 다시 학창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성적보다는 신문 만들기에 전념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장명수 사장은 한국일보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축하를 받았다. 최초의 여성 언론사 사장이라는 점에서도 그랬지만, 아직은 족벌 경영 체제가 많은 우리나라의 언론 현실에서 전문기자가 최고 경영자의 위치에까지 올랐다는 사실에서도 큰 관심을 모았다.

한국일보 기자들은 장명수 사장의 취임 이후 작지만 근본적인 문제들이 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일보 이상연 기자는 그의 취임이 한국일보 구성원 모두에게 기자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 "어느 회사보다도 열린 조직이라는 느낌, 어느 신문사보다도 변화를 포용한다는 느낌을 갖게 했습니다. 언론인의 정신이 살아있는 언론인을 경영자로 받아들였다는 기자로서의 자부심이죠."

여성계 역시 장사장의 취임을 열렬히 환호했다. 여성이 수습기자로 시작해 여성 최초 주필을 거쳐 사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희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장사장도 자신의 뒤를 이을 여기자들, 전문 여성인에 대해 갖는 기대가 크다. "남녀 차별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자기 일에 전념해서 실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정작 그 자신도 여러 번 차별의 벽에 부딪쳐 좌절한 기억이 있지만 인생 자체가 순풍에 돛 단 듯 원만할 수만은 없다며 "작은 갈등에 지치면 멀리 갈 수가 없어요"라고 말한다. 갈등도 많고 좌절도 많지만 결국엔 실력으로 평가받을 날이 오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세상을 바라보는 넓은 안목을 기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신문을 읽고 좋은 글을 많이 읽을 것도 당부한다. 또, 여성의 직장 생활을 잘 이해해 주고 가사 일을 도와줄 줄 아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적 문제라고 했다. 자녀를 둔 여기자 수가 많아지면 직장 내 탁아소 설치를 고려해 볼 참이지만 아직은 아기를 둔 여기자가 몇 안되는 실정이다.

장사장 자신도 가정을 가지고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뼈저리게 경험했다. 스스로도 주부로서는 낙제점이라고 평가하는 그는 가정을 생각하면 늘 미안하다고 했다. "훌륭한 주부이기는 일찌감치 포기했죠." 그나마 같은 언론인인 남편 심재훈씨('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 서울 지국장) 가 그를 많이 이해하고 도와주었고, 아이없는 단출한 가정이었기에 신문에 그토록 전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8할은 남편 덕분이에요"라며 매일 손수 아침을 차리면서도 불평 한 번 한 적 없다는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시했다. 각자의 바쁜 생활로 걸핏하면 주말 부부가 되지만, 남편은 글의 소재를 구해주고 논조도 평가해주는 최고의 독자이자 친구라고 했다.

주위에선 그를 성공했다고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마음의 허전함을 느낄 때가 있다. "친구들이 장성한 자식들을 데리고 외출하는 것을 볼 때면 단출한 두 식구가 허허롭다고 느껴지죠. 그러나 인생에서 많이 가질 수는 없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 한가지를 가졌으니 그걸로 만족해야죠." 몇 해 전 남편이 선물한 강아지 '해피'와 '안젤라'가 그들의 자식 노릇을 톡톡히 한다고 했다. 잠시 눈을 내리깔던 그는 강아지 이야기를 꺼내가 금세 본래의 환한 목소리로 돌아왔다.

장명수 사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였던 고(故) 이태영 박사의 말을 늘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여성 법률 상담소를 차려 평생 여성들을 도우며 사셨던 이태영 박사. 장명수 사장이 주필의 자리에 오르던 날 이 박사는 그에게 사장이 되어 언론의 힘으로 억눌린 여성을 돕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때만 해도 여성이 신문사 주필이 된 것만도 기적같은 일이어서 사장의 자리는 장명수 사장 스스로도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지어놓았었다. 그러나 이제 정말로 사장이 되고 나니 이박사의 말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고 했다. 개인의 성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그 성공을 돌려주고 여성들을 일으켜 세우고자 더 큰 꿈을 잃어서는 안되겠다고 다짐한다.

"더 좋은 신문을 만들어 더 많은 독자가 읽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사장 취임을 그토록 기뻐해 준 한국일보 직원들, 모든 여성, 그리고 딸을 둔 부모들에게 보답하는 길이겠죠. 내가 제대로 문을 닫고 나갈 때 다른 여성들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처음 사장직을 받아들일 때나 취임 후 4개월이 지난 지금이나 유별난 경영전략은 만들지 않는다는 그는, 기자 생활 36년 동안 늘 생각해 왔던 '좋은 신문을 만들겠다'는 것이 유일한 경영 철학이자 경영 전략이라고 했다.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시시비비를 가려 바른 정보를 주어야 하는 언론인의 책임과 의무를 잊지 않는 경영인이 되겠다고 포부를 밝히는 그의 목소리에서 단호함이 묻어 나왔다. 그 포부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지 지켜볼 일이다.

 임정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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