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환 씨(32) 친가에는 7명의 자살자가 있다. 집안에 어두운 분위기가 깔린 이유다. 정 씨는 두 살 터울인 누나에게 많이 의지했다. 그러나 스무 살 때, 누나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가 13년 동안 가슴에 묻었던 이야기를 꺼내자 훌쩍이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2월 20일 오후 3시, 서울 강남구 논현동 엠팟홀. ‘자살예방 및 유가족에 대한 인식개선을 위한 토크콘서트, 따뜻한 동행’에서였다. 한국자살예방협회가 주최한 행사에는 유가족 30여 명과 시민 70여 명이 참석했다.

기자 옆의 30대 여성은 연신 눈물을 닦았다. 객석에서 중년여성이 손을 들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웅변 학원을 27년을 했습니다. 그런데 내 자식들의 죽음만큼은 한 번도 웅변을 할 수가 없었어요. 자살이란 이야기를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주세요.”

▲ 토크콘서트 ‘따뜻한 동행’에서 백종우 한국자살예방협회 사무총장이 행사를 진행하는 모습.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다. 13년째 계속된 기록. 지난 10년간 자살자는 13만 8000명에 이른다. 유가족 숫자는 훨씬 많다. 보건복지부는 자살사망자 1명에 대해 5~10명의 유가족이 있다고 본다. 해마다 8만 명, 최근 10년간 70만 명 이상의 유가족이 생긴 셈이다. 서울 송파구 주민(2014년 기준 67만 명)과 비슷한 숫자다.
 
자살유가족은 자살에 가장 취약한 조건에 있다. 일반인보다 우울증은 7배, 자살 위험은 8.3배 높다. 보건복지부와 서울대병원의 2016년 연구에 따르면, 조사에 응한 유가족 76명 중 31명(41.3%)이 자살하고 싶은 생각을 진지하게 했다고 답했다.
 
정 모씨(32)는 초등학교 6학년 때에야 큰아버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큰아버지는 정 씨가 3살 때 자살했다. 큰아버지의 자살은 정 씨의 아버지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너무 힘들어서 숨을 쉬기 힘들다고 얘기하면, 아버지도 삶을 포기하고 싶다고 하셨다.” 8년 전, 정 씨는 수면제 150알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 이틀 만에 병원에서 깨어났다.

국내 자살관련 정책은 자살자 중심이다. 유가족에 대해서는 실태조사조차 되지 않은 상태. 이들은 정신건강복지센터나 지역 자살예방센터, 민간 자살예방센터의 자조모임이나 상담에 의지한다.

서울시자살예방센터는 월 1회 ‘자작나무(자살 유족의 작은 희망 나눔으로 무르익다)’ 모임을 마련한다. 참여자는 많지 않다. 자살예방기관 중 규모가 큰 편인 한국생명의전화와 연결된 유가족은 전국에 걸쳐 200여 명에 불과하다. 구 단위의 자살예방센터에서는 모임이 열리기 힘들다. 서울 성북구 자살예방센터와 상담하는 유가족은 두세 명 수준.

▲ 서울 영등포구의 라이프호프 기독교 자살예방센터.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자살 유가족을 위한 예배가 열린다.

자살 유가족을 위한 대책은 갈 길이 멀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점은 인력. 오만종 라이프호프 기독교 자살예방센터의 강동지회장은 “자살관련 사업의 담당 공무원이 6개월에서 1년 사이로 바뀐다. 심한 곳은 3년 동안 6명이 바뀐 곳도 봤다”고 말했다.

워낙 자주 바뀌니 전문성을 갖추기가 쉽지 않다. 24시간 상담 전화 역시 인력이 부족해 불통일 때가 많다. 자살유가족인 김 모 씨는 “24시간 상담전화가 네 곳이나 불통이라 청소년 상담센터에 전화를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자살예방사업 예산은 99억 3100만 원. 하상훈 한국생명의전화 원장은 “중앙자살예방센터나 심리부검센터 운영비만 생각하면 큰돈이 아니다. 전문성 있는 민간단체까지 지원할 여력이 없다”고 아쉬워했다. 한국생명의전화는 민간 전화상담기관으로 자살예방 및 유가족 프로그램을 1976년부터 운영하는 중이다.

전문가와 유가족 모두, 일회성 지원이나 상담보다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모았다. 정 모씨는 “사람이 적어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려면 몇 개월에서 1년은 지나야 하는데, 그 전에 상담이 끝나버린다”고 말했다. 황순찬 서울시자살예방센터장은 “7년, 8년이 지나도 모임에 나오시는 유가족도 있다”고 했다.

▲ 황순찬 서울시자살예방센터장. 서울시자살예방센터는 서울시 구로구에 있다.

자살을 막고 유가족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려면 이들이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하상훈 원장은 “자살 유가족은 밝은 곳에 가지 못한다. 동네 사람 창피하니까 가까운 길을 빙 돌아서 간다고들 한다”고 전했다.

다행스럽게도 변화의 물꼬가 트고 있다. 서울시자살예방센터는 유가족 중 17명을 멘토 상담가로 양성하는 교육을 작년에 진행했다. 일대일 매칭을 통해 멘토 유가족이 새 유가족을 상담하고, 자조모임을 진행하도록 교육한다.

앞서 소개한 토크콘서트 ‘따뜻한 동행’은 유가족뿐만 아니라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열렸다. 4명의 청소년 팀이 유가족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만든 UCC를 상영하기도 했다. 무대에서 이야기를 마치며 정 씨는 눈물을 글썽였다.

“저는 유가족으로서 마음의 장애를 항상 안고 있었던 거 같았어요. 하지만 이 장애는 해결이 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상처를 꺼낼 수 있는 장소와 기회는 충분히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제 이야기를 듣고 우는 것만으로도 장애는 조금씩 사라지더라구요. 그렇게 장애의 원흉을 찾아가 해결했을 때, 엄청난 자유와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넘어야 할 산은 큰 산이 아닙니다. 충분히 한걸음씩 나아간다면 넘어갈 수 있는 산이고, 더 나아가 다른 이까지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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