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주에 사는 직장인 박봄님 씨(29)는 2016년 초부터 래브라도 리트리버 겨울이를 키운다. 반려견 펜션에 갔다가 국내 헌혈견 운동을 주도하던 강부성 씨(44)를 만나 헌혈에 대해 알게 됐다.

헌혈을 하면 70만~80만 원인 건강검진을 무료로 받을 수 있고, 아픈 강아지도 도울 수 있어서 일석이조라고 생각했다. 곧바로 참여하고 싶었지만 직장생활 탓에 시간여유가 없었다. 2월 11일 일요일, 드디어 긴급 헌혈요청이 들어와 서울대 수의과대학 동물병원으로 출발했다.

박 씨는 “헌혈과정에 생각보다 많은 의사가 필요해서 놀랐다. 소변·대변 검사는 물론, 심장사상충·혈청 검사까지 친절하게 하고, 끝난 뒤에 영양식을 잘 챙겨줘서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박 씨는 그 날 이후로 주변에 헌혈을 적극 추천한다. 대형견을 키우는 친한 지인과 내년에 병원을 다시 찾기로 약속했다.

▲ 서울대 동물병원에서 헌혈하는 겨울이

반려견도 헌혈을 할 수 있나요?

반려견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고나 질병으로 수혈을 받아야 한다. 이때 혈액형을 판별하고 헌혈견과 수혈견 사이의 혈액 적합성 검사를 받아야 한다. 농촌진흥청 가축질병방역팀의 도윤정 수의연구사는 “반려견 혈액형은 20가지 정도가 보고돼 있지만, 사람만큼 체계가 잡혀있지는 않다. 국내에서는 DEA 1형만 판별할 수 있다”고 밝혔다.

혈액형으로 인한 부작용은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도윤정 수의연구사는 “대부분의 반려견 혈액은 사람의 O형과 비슷하게 치명적 부작용이 없어서 무난하게 수혈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급성 용혈성 빈혈을 유발한다고 알려진 DEA 1형이라도 처음 수혈 받는 경우라면 큰 문제가 없다.

▲ 서울대 동물병원의 헌혈 프로그램 포스터

헌혈에 참여할 수 있는 개는 제한적이다. 서울대 동물병원은 2~8세, 체중 25㎏ 이상의 건강한 대형견을 기준으로 한다. 체중에 비례해서 피의 양을 결정하므로 소형견은 적합하지 않다. 국내에서는 주거환경을 이유로 소형견을 선호하므로 헌혈견을 찾는 일부터가 쉽지 않다.

뽑을 수 있는 피의 양 역시 제한적이다. 도윤경 수의연구사는 “한 번에 피를 많이 뽑더라도 저장을 오래할 수 없으므로 수혈견과 헌혈견의 건강상태를 고려해 그때그때 결정해야 한다. 수혈의학에서는 반려견의 경우 3개월 정도의 간격을 두고 헌혈하도록 권장한다”고 설명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헌혈이 반려견 건강에 나쁜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는 반려견을 데리고 보호자가 마음대로 헌혈을 결정한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도 많다.

이리온 동물병원의 청담본점이 2014년 시작한 헌혈견 프로젝트는 처음에 좋은 반응을 얻었다. 자긍심과 뿌듯함을 느꼈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러나 프로젝트가 2년 정도로 길어지자 불편함을 토로하는 보호자가 생겼다. 반려견을 걱정하는 보호자를 보며 수의사들이 헌혈을 적극 권하지 못해 프로젝트는 사실상 중단됐다.

문재봉 이리온 대표원장은 “의학적으로 동물헌혈은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반려견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보호자가 헌혈에 불편한 마음을 갖고 죄의식을 느낀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그는 동물도 수혈이 꼭 필요하다는 점을 알리고, 헌혈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부터 제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이리온 동물병원 청담점은 대형견을 대상으로 헌혈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갈 길 먼 ‘헌혈 인프라’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조차 헌혈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헌혈견 겨울이의 보호자 박봄님 씨는 “대형견 견주 38명의 카카오톡 채팅방이 있는데, 내가 소개하기 전엔 아무도 반려견 헌혈에 대해 몰랐다”며 “소형견이나 중형견을 키우는 견주는 헌혈견을 통해 도움을 받아본 경험이 있어야 개도 헌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큰 진입장벽은 다름 아닌 ‘접근성’이다. 헌혈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병원이 극히 드물뿐더러, 병원 차원의 홍보는 온라인 홈페이지의 포스터 외에 따로 없다. 국내 대학부속 동물병원 중에는 서울대 동물병원이 유일하게 헌혈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지인소개를 통해 헌혈에 참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려견 소원이(래브라도 리트리버)를 키우는 직장인 이동윤 씨(36·경기 고양시)도 여자친구를 통해 헌혈에 대해 처음 알았다. 그는 “반려견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보니 헌혈 프로그램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고 말했다.

▲ 소원이는 서울대 동물병원의 헌혈에 참여한 뒤부터 헌혈견을 상징하는 빨간색 ‘Donor Hero’ 스카프를 매고 다닌다

소개를 받더라도 일부 견주는 너무 멀다며 참여를 꺼린다. 박봄님 씨는 “대형견 견주를 보면 헌혈취지엔 공감하지만 충북 청주에서 서울대 동물병원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서 못 가는 분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직장인은 주말에만 할 수 있는데, 병원이 문을 열지 않기 때문에 긴급 헌혈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강부성 씨는 반려동물 팟캐스트 ‘개소리’를 진행하며 반려견 커뮤니티를 운영한다. 그는 서울대 동물병원과 자주 연락하면서 긴급 수요가 있을 때마다 대형견 보호자를 중심으로 연락을 돌린다. 한 달에 적게는 2건, 많게는 4건까지 연결한다.

그는 지난해 7월부터 커뮤니티에서 헌혈 릴레이 운동을 주도하는 중인데 “서울대 동물병원을 제외하고는 대형병원이 없어서 지방에 사는 개는 참여하기 어렵다. 권역별로 한 군데 씩이라도 헌혈할 수 있는 동물병원이 생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헌혈에 시간이 많이 들고 반려견이나 보호자가 쉴 수 있는 공간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박봄님 씨는 “이동시간을 제외하더라도 검사 1시간, 헌혈 1시간, 수액을 맞는 데 3시간가량이 걸렸다”며 “오랫동안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겨울이 옆을 지키다보니 너무 피곤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휴게소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골든 리트리버 금순이를 통해 헌혈했던 오지희 씨(39·경기 부천)는 “취지가 정말 좋지만 아직은 시스템이 제대로 마련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견주는 맨바닥에 앉아서 기다려야 했고, 헌혈을 하는 방에 고양이(공혈묘)도 같이 있어서 많이 불편했다”고 토로했다.

헌혈과 공혈, 공존의 길을 찾아서

헌혈견 이슈는 필연적으로 공혈견(供血犬) 문제와도 부딪힌다. 공혈견은 다른 동물의 치료에 필요한 혈액을 제공하거나 항체 및 의약품을 위해 혈액이 채취되는 동물을 말한다. 헌혈만으로 모든 수요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피를 뽑기 위해 사육되는 공혈견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혈액을 목적으로 개를 키우는 현실에 대한 ‘불편한 시선’이 있다. 국내에서는 강원 속초의 ‘한국동물혈액은행’이 공혈견을 대규모로 사육하며 동물혈액 매매업을 90% 정도 독점하고 있다. 지난 2015년 공혈동물의 관리부실 문제가 처음 제기됐지만, 정확한 보유규모와 관리실태는 알려지지 않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반려견 헌혈운동을 주도하는 강부성 씨는 “공혈견 문제에 관심이 있더라도 민간기업이 혈액은행을 운영하다보니 사육환경을 개선할 방법이 없다”며 “일반 반려견 보호자들이 헌혈을 많이 하면 공혈견이 점점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미자 씨(51)는 반려견 분양·위탁 사업을 하며 개들을 번갈아 데려가 헌혈한다. 그는 “공혈견이 불쌍하고 안쓰럽긴 하지만 일반 견주가 해결할 수 없는 측면이 있어서 헌혈에 꾸준히 참여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공혈견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다. 문재봉 대표원장은 동물헌혈이 의학적인 면에서 꼭 필요하므로 채혈규정만 잘 지키면 윤리적인 부분에서 조금 자유로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동물혈액은행에 대해서도 “혈액키트를 국산화하고 혈액 치료제를 공급하는 등 사회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일을 많이 하는 곳이다. 공혈견이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도록 돌본다면 동물보호 단체와도 제도적인 합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대학생 김정현 씨(23)는 작년 5월부터 반려견 헌혈 프로그램을 알리는 ‘유봉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이다. 그는 헌혈견과 공혈견을 선악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인식 자체가 잘못이라고 꼬집었다.

“다른 강아지를 위해 피를 나눈다는 점에선 본질적으로 똑같은데, 공혈견을 무조건 수동적이고 불쌍한 존재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사람의 경우에도 매혈이 존재하듯, 현실적으로 공혈견을 무조건 없앨 수는 없다. 헌혈견과 공혈견의 건강한 공존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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