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6.25때 한국을 지원하여 온 것만이 아니며 우리의 무수한 동포를 죽였다는 것을 여러분은 옆의 피카소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

1999년 가을, 과연 이 말을 부정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13년 전 이 한 문장을 쓰고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는 혐의로 1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청년이 있었다. 작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출감 후에 기자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10년이 넘게 한국에서 미국이 갖는 의미를 다각도로 밝히기 위한 취재를 계속해 오고 있다.

나는 피카소를 믿었고 상식을 믿었고 그와 관련된 몇 권의 책을 읽었을 뿐이다

1986년, 전국의 중고등학교에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됐다. "6·25 때 미군이 우리 동포를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당시 연세대학교 총학생회 교육국장이던 오연호(월간 『말』기자)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인민군 뿐 아니라 한국군과 미군에 의한 동포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그가 요즘 보도되고 있는 미군의 양민학살 사례들을 다 알고서 그런 내용의 편지를 쓴 것은 아니었다. 그저 민족애에 불타는 청년으로 상식과 직관, 몇몇 자료를 믿고 쓴 글이었다. 그런데 이제 중년의 기자가 된 그가 20세기가 저물어 가는 가을, <노근리 그 후>라는 두 번째 편지를 띄웠다.  

"13년 전 편지의 비약을 반성하고, 육하원칙에 따라 미국의 또 다른 면을 파헤친 지난 10년간의 취재 보고서입니다." 하지만 첫 번째 편지의 증거자료 부족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후회하지 않는 오연호 기자의 마음는 <노근리 그 후> 곳곳에서 엿보인다. 총 4부로 엮어진 <노근리 그 후>의 1부 '노근리의 진실'편에도 그가 1994년 6월 최초로 노근리를 현장검증하고『말』7월 호에 썼던 옛기사 전문을 그대로 실었다. 아무도 알지 못한 채 묻혀 버린 그 기막힌 이야기를 객관적인 기사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기고 싶은 초심으로 쓴 기사였다. 5년 전,『말』과『한겨례』에 실린 노근리 학살 기사를 못 본 척 했던 우리의 주류 언론들이 노근리를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고 있는 요즘, 그의 기사를 읽으면 끓는 피가 느껴진다. 오연호 기자는 계속해서 제2, 제3의 노근리를 고발한다. 단양 곡계굴, 사천 조장리, 마산 곡안리, 황해도 신천, 화순 탄광…. 나아가 베트남에도, 코소보와 동티모르에도 또 다른 노근리가 있었다. 그리고 외세의 군화에 짓밟힌 그 어느 곳에서도 그는 노근리 학살의 야만과 다시 마주칠 수 있었다.

오연호 기자가 본 미군 범죄의 핵심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것, 즉 야만이었다. 그리고 그는 '20세기와 함께 결별해야 할 야만에 대한 보고서'라는 생각으로 <노근리 그 후>를 썼다. 특히 제 2부 '미군범죄 55년사'에서 그는 발로 취재한 사건들을 자세히 기록했다.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될 인권유린을 고발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따라서 <노근리 그 후>는 주한미군범죄 55년사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10년간 한 길을 달려온 기자의 절절한 취재기다.

30년 만의 특종

오연호 기자가 노근리의 진실을 알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94년『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도서출판 다리)』라는 실록소설을 쓴 정은용(78) 노인과의 만남이었다. 정은용 노인은 한국 전쟁사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했던 노근리 양민들의 무고한 죽음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최초의 기자였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린 아들과 딸, 일가친척을 미군의 총에 어이없이 잃게 된 노근리 학살 이후 미군의 이 만행을 고발하기 위한 증언을 채록하고 많은 자료를 뒤졌다. 그러나 진실이 묵살되는 여건 속에서, 비로소 5년 전에야 실록소설의 형식을 빌려 노근리 학살을 고발할 수 있었다.

오연호 기자는 정은용 노인을 30년 넘게 자신이 간직한 뉴스를 알리기 위해서 뛰어다녔던 대기자라고 칭한다. 그리고 자신은 대기자와 함께 노근리 학살을 최초로 현장답사 했던 소기자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연호 기자가 정노인의 소설에서, 피카소의 그림에서 진실을 읽어낸 것은 사실을 넘어 진실을 밝혀낸 대기자다운 직관이었다. 다시 1999년 가을, AP와 미국 주력 일간지에 실린 노근리 학살 기사에 냄비처럼 끓어올랐던 우리 언론들은 또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미군범죄에 대해서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다. 대부분의 언론은 아직도 베트남 참전 한국군이 그 곳의 양민들을 학살했던 사실을 쉬쉬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에서 은폐되어 온 미국의 숨은 의미, 13년 전 순수했던 믿음을 진실로 밝히기 위한 취재를 계속하고 있는 오연호 기자의 중간 보고서 <노근리 그 후>가 유난히 돋보인다.  

김재은 기자<dewed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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