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진보정당인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 박기태
 
우리 사회의 진보, 좀 약하게 잡아 개혁 세력은 끊임없이 분열해왔다. 이번 총선은 그 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유시민은 민주노동당을 찍는 표를 '사표'라고 했고, 진중권은 이에 대해 '앵벌이 짓'이라고 비난했다. 이런 식의 원색적인 대응들은 각 사이트들에서 더 증폭되어 나타났다. 민주노동당의 비판적 지지자들의 모임'이라는 진보누리(http://jinbonuri.com)에는 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이나 별 차이 없다는 글들이 다수 올라왔다. 또한 노사모를 비롯한 친 열린우리당 게시판들에는 민노당을 찍는 것은 사표를 만들어 결국 한나라당을 도와주는 일이라는 비분어린 글들이 수없이 올라왔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있었던 사회당과 민주노동당의 분쟁, 운동권으로 가면 PD와 NL의 분열, 멀리 갈 필요도 없이 현재 대학교 학생회의 갈등들만 봐도, 진보가 분열해왔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분열의 양상들을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이 진보에 대해 실망한다. 언론에서는 진보정당들을 가리켜 '불안하다'라고 말한다. 보수 정당은 '국가에 안정이 필요하다'고, '불안한 그들에게 나라를 맡기지 말라'고 주장한다.

사실 진보는 역사 속에서 한번도 불안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맑스가 논쟁했던 집단은 부르주아가 아니라 바쿠닌 등의 '다른 좌파'였다는 사실이 그 단적인 예다. 어지간해서는 분열하지 않는 '점잖은' 보수에 비해, 진보는 늘,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서도 저마다의 '노선'을 가지고 분쟁을 계속해왔다. 경박하고 불안하다고 할 만한 일이다.

그렇다면 왜 진보는 분열해왔을까. '진보'혹은 '개혁'자체가 가지는 정체성 때문이다. 크게 보면진보란 현재 사회에 비하여 좀 더 앞으로 나아가려는 것, 발전하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현재'를 지키고 보완하자는 뚜렷한 목적을 가진 보수에 비해, 수많은 불명확한 노선들을 가지게 된다.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는지, 어떤 방법이 더 효과적인지에 대한 생각이 다들 다르기 때문에 진보는 아무런 보장 없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진보는 비판에서 시작된다. 가톨릭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 개신교가 수많은 분파를 가지고 있듯이, 비판을 정체성으로 가진 집단은 새로운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역시 개신교가 그러하듯, 진보는 분열의 소지를 가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설령 분열한다고 해도 그 사이에 활발한 토론과 비판이 가능해진다는 사실이다.

비판을 인정한다는 것은 열려 있음을 말한다. 권위를 내세웠던 사회가 깨어짐을 말한다. 이번 총선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논전이 있었고, 유시민, 노회찬 등의 '말 잘하는'인물들이 스타로 부각되었다. 소위 엘리트들에 의해 밀실에서 벌어지던 정치가  깨어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말이 통하는 사회, 상식이 통하는 사회'는 비판을 인정하는 진보의 정체성으로 인해 가능하다. 종교 혁명으로 인해 가톨릭 역시 좀 더 ‘열린 사회’가 될 수 있었듯이, 서로 비판하고 분열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정체되어 있는 사회에 활기를 주는 것이다.

진보의 목표인 ‘깨어짐’은 불안정한 것이다. 그 뒤에는 어떤 보장도 없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불안감을 느낀다. 그래서 68혁명 당시 프랑스의 유권자들은 결국 다시 드골을 선택했으며, 86년 서울의 봄을 지난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안정'을 내세운 노태우를 선택했다. 그들의 선택도 일리가 있다. 진보는 안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진보의 힘이다.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창조할 수 있는 힘이다. 새는 알을 깨려고 버둥거린다는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전에 존재하던 어떤 세계를 깨어야만 한다.

춤추는 별을 낳으려면 인간은 자신 속에 혼돈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 니체

우리 사회는 정체되어 있다. 수많은 권위와 '틀'이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 니체의 말처럼 창조를 위해서는 혼돈이 필요하다. 서로를 비판하고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유시민이 캐주얼 복장을 하고 국회에 갔을 때의 비난을 기억하는가? 유시민은결국 양복을 입었으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청바지를 입고 단상 위에 다리를 올려놓을 수 있는, 형식에 갇히지 않은, 열려 있는 의원들이다! 꽉 막혀 있는 국회가, 정체되어 있는 한국 사회가 그들에 의해 새로 태어날 수 있다. 설령 그들이 서로 다투고 분열한다고 해도, 실제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도, 때론 과격하더라도 실망하지 말자. 그리고 기억하자. 그 모든 것은 진보의 숙명임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모습임을. 차라리 그들을 비판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소리 높여 외치자. 더 큰 혼돈을 위하여, 여기에 비로소 태어날 '열린 사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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