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답게 살기 위한 투쟁 - 70년대 노동운동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친구여! 나를 모르는 모든 이여!

나를, 지금 이순간의 나를 잊지 말아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결코 두렵지 않을 걸세.

힘에 겨워, 힘에 겨워 다 못 굴린, 그리고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쉬러 간다네. 잠시 다니러 간다네.

- 전태일이 남긴 글 중에서      

"배가 고프다." 전태일이 병원에서 눈을 감기 전에 남긴 마지막 한마디다. 70년대 노동자들은 하루 14시간 이상 지옥 같은 다락방에서 일했다. 하지만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들었다. 눈부신 고도성장을 만들어 낸 사람은 박정희가 아니라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극도의 저임금과 열악한 근로 조건 아래에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한 사람의 목숨이 필요한 시대였다.

전태일에서 시작된 민주노조운동

전태일의 분신은 70년대 민주노조운동 시작의 불을 당겼다. 당시 국가는 노동운동에 대해 제도적, 물리적 탄압을 가하고 있었다. 한국노총, 각 산별노조 및 단위 사업장의 어용노조들은 권력에 아첨하며 제 밥그릇 챙기기에 바빴다. 이에 맞서 민주노조는 노동조합의 자주성과 민주성을 지키고자 했다.

70년 11월 27일, 전태일이 죽은 직후 청계피복노동조합(이하 청계피복)이 만들어졌다. 청계피복은 70년대 민주노조의 살아있는 신화다.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세요"라는 유언을 들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전태일의 호소를 잊을 수 없었던 동료노동자들의 노력으로 결성된 노동조합이었다. 청계피복의 노동자들은 밥 먹듯이 고문과 구속을 당하면서도 목숨을 걸고 투쟁했다. 청계피복과 함께 원풍모방노동조합, 동일방직노동조합, YH무역노동조합 등이 70년대의 대표적 민주노조들이다.

여성의 힘으로

70년대 우리나라는 섬유, 봉제, 전자 등 경공업 중심의 산업 구조를 갖고 있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노동운동은 경공업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여성노동자들은 가부장적인 사회 제도 아래에서 남성노동자들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 더 많은 희생을 강요받았다. "여성노동자들이 남성노동자들에 비해 현실에 대한 자각이 빨랐어요. 이들이 중심이 된 민주노조는 유신정권 아래에서 많은 역할을 해냈죠."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의 임윤옥(43) 씨는 말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지부장을 낳은 곳은 동일방직노동조합(이하 동일방직)이었다. 1972년의 정기대의원대회에서 당시 부녀부장이던 주길자가 회사 쪽 지원을 받는 남자후보들을 큰 표차로 물리치고 첫 여성지부장으로 선출됐다. 당시 동일방직의 1383명 조합원 중 1214명이 여성이었다. 그러나 주길자가 선출되기 전에는 회사 권력과 결탁한 기술직 남자들이 조합간부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압도적 다수인 여성이 조합 활동으로부터 소외당했던 것이다. 무기력한 어용노조와 가부장적 성차별이라는 이중의 굴레에 익숙해 있던 여성노동자들이 자신을 대변할 여성 후보를 내세워 지부장으로 당선시킨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여성노동자들에 비해 상대적 이익을 누렸던 남성노동자들은 여성의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악역인 경우가 많았다. 78년 2월 21일, 동일방직에서는 어처구니없는 '똥물사건'이 일어났다. 노조사무실은 노조대의원 선거를 위해 막 선거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회사 권력의 부탁을 받은 남자 노동자들이 방화수통에 분뇨를 담아 노조사무실로 달려들었다. 이들은 투표하러 오는 여성조합원들의 얼굴과 옷 등에 닥치는 대로 똥을 퍼부었다. 여성조합원들은 현장에 있던 경찰관들에게 울부짖으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욕설뿐이었다. 투표함은 부숴 지고 사무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회사가 노조대의원 선거를 막기 위해 꾸민 일이었다. 

유신정권을 몰락시킨 YH무역노조 농성사건

79년 8월 10일, 마포구에 위치한 신민당사에서는 노동자들의 농성이 벌어지고 있었다. YH무역노조 소속인 180명의 여성노동자들이 농성의 주인공이었다. 이들이 기숙사에서 농성을 벌이자 회사 쪽은 기숙사를 폐쇄해버렸다. 갈 곳이 없어진 노동자들은 최후의 항전지로 신민당사를 선택했다. 내,외신 기자가 상주하는 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면 큰 파급효과가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를 당사에서 내쫓으면 모두 마포대교로 가서 한강에 떨어져 죽겠다고 했던 기억이 나요." YH노조위원장이었던 최순영씨는 <노동과 세계>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고했다. 신민당은 어린 여성노동자들을 최대한 지키려 노력했지만, 유신정권은 8월 11일 새벽 2시 이들에게 무자비한 탄압을 단행했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YH무역노조 농성사건으로 끝을 맺었다. 이 일은 어마어마한 결과를 가져왔다. 유신정권의 폭력성에 국민들은 분노했고 반독재투쟁이 시작됐다. 한번 시작된 투쟁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10월 16일, 유신철폐를 외치던 부산대생들의 가두시위는 순식간에 부마민중봉기로 발전했다. 곧 유신정권은 한계에 부딪혔다. 박정희는 심복이었던 김재규가 쏜 총탄에 쓰러졌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유신정권이 180명 여성노동자들의 용기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

지난 4월 29일 KNCC 인권위 창립 30주년 기념행사에서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씨가 공로패를 받았다.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면서 주인 노릇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라는 이소선씨. 노동자들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이소선씨는 노동운동의 산 역사다. 노동자들은 지옥 같은 작업장을 개선하고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져오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여성노동자들은 공순이라고 무시당하면서도 폭력 앞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맞서 싸웠다. 푸른 봄날 5월 1일을 May day - 노동자의 날로 정한 것은 단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청춘을 바쳤던 그들을 기리기 위해서가 아닐까.


 
김유리 기자<kimyuri8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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