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하기 짝이 없다! -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 1904 - 1989>

달리의 전시를 본 기회가 있었다. 거의 10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갤러리의 전체적인 조명은 어두침침했고 배경음악까지 같은 느낌으로 코디되어 있었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에서 그의 그림은 충격이었고 공포였다. 한 사진에서는 말린 콧수염의 늙은 달리가 젊은 여자 모델의 가랑이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미친 노인. 그 전시회에 대한 극단적인 나의 결론은 그랬다.

살바도르 달리.(1904~1989) 에스파냐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 포졸 같은 콧수염을 말아 올린 무표정한 그의 얼굴. 일반적인 감상이 다소 부담이 되는 엽기적인 그림을 그린 사람. 자신의 천재성을 스스로 확인했다는 괴짜 같은 예술가. 이 정도까지만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속 편하다. 그의 작품을 해석을 하고 의미를 찾으며 그의 가치관까지 이해하려 한다면 당신은 분명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져들 테니깐. 그래도 이 괴이한 그림들과 그에 못지않은 예술가에 대한 호기심 충족을 원한다면 읽어보시라.

망상적으로 결합하되 객관적으로 해석하라

이야기의 출발을 이 혼란의 원인에서부터 출발하자. 달리의 그림을 본 후 불유쾌함의 원인은 그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림 <계몽된 쾌락>을 보자. 중간 상자에는 코피를 흘리는 자화상과 메뚜기가 있다. 이것은 히스테릭한 두려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왼쪽의 상자에는 한 남자가 바위를 향해 총을 쏘고 있다. 그 바위는 사람처럼 피를 흘리고 있다. 오른쪽의 상자에서는 머리에 아몬드를 얻은 자전거 타는 남자 패턴이 보인다. 앞부분에 위치한 여자는 피 묻은 손으로 뭔가를 갈구하고 있다.

 

하나의 제목아래 그려진 그림인데도 요소간의 연결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 당신은 쾌락이라는 단어에서 어떤 형상을 떠올리는가. 영화 속의 한 장면일수도, 어떤 이의 얼굴일수도, 형상이 아닌 그저 붉은 색일 수도 있다. 그저 떠오르는 것. 그것을 달리는 정밀한 묘사로 그려냈다. 다분히 그런 이미지들은 필연적인 연관성이 없을 수 있으므로 화면의 구성은 위의 그림처럼 그저 놓여 있는 것이다. 의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화면으로 주제를 표현하는 것은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수법이다. 초현실주의는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의 개념에 영향을 받았다. 그저 떠오르는 형상들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무의식이 꿈이나 우리가 우연이라고 부르는 사건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암시다.

두 날개로 초현실 세계를 비행하다

달리는 특히 그만의 특유의 화법을 편집광적 비판적 활동이라 명명했다. 비합리적인 지식의 결합을 비판적, 조직적으로 객관화해서 해석하는 것이다. <계몽된 쾌락>에서처럼 논리적이지 않은 이미지들을 결합해 화면에 형상화한 후 전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라 이해할 수 있겠다. 이러한 방법으로 달리는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반 혹은 그 이상의 무의식의 세계에 더 다가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쓴 또 다른 기법은 이중영상(Double images)이다. <Spain>이란 그림에서 보이는 이중 영상은 한 여인의 모습이다. 스페인 내전을 염두하고 그는 이 그림을 그렸다. 높은 나이트 스탠드 서랍사이로 흘러나온 살점은 내란의 희생을 암시한다. 마치 매직아이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시선을 최면상태에 가깝게 만들 때 여인의 모습이 보이게 된다. 여인의 머리는 군중의 형상이 만들어 내고 있다.

초현실주의란 바로 나 자신이다

그의 작품만큼 특이한 것이 인간 달리였다. 그는 어느 때고 웃음이 나면 미친 듯이 웃었다. 부엉이의 분뇨를 근엄한 사람들의 머리위에 얹는 상상이 그를 발작적으로 웃게 했다 . <음산한 놀이>에는 그의 분뇨 묻은 팬티가 등장한다. 달리는 그의 인생에서 완벽한 여인이라 생각한 갈라를 위해 겨드랑이에 물을 들이기도 했다. 털 달린 욕조를 백화점 디스플레이로 선택했다. 그리곤 자신의 디스플레이를 변형시켰단 이유로 백화점의 창을 깨버리고 뛰쳐나간 적도 있다. 그는 형체가 없다는 이유로 시금치를 먹지 않았고 딱딱한 갑각류의 속살을 먹을 때 희열을 느꼈다. 그는 남들과 다르기를 미친 듯이 원했다. 모든 것, 모든 사람과 반대로 나가는 것이 그의 원칙이었다.

“누가 ‘검정’이라고 말하면 나는 곧장 ‘하양’이라고 대답했고, 누가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하면 나는 침을 뱉었다. 남과 다르게 느끼고 싶다는 지속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분을 삭이지 못해 울 때도 있었다”  (그의 자서전 中)

우리가 그의 광기어린 특이성을 의아해 하듯이 우리들의 ‘정상성’에 달리는 익숙할 수 없었다. 자기의 머릿속에서 생길 법한 일들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를 경악케 하는 것은 늘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는 인간의의 맹목적인 습성이다. 자신의 수표를 받아든 은행직원이 그 수표를 집어삼키지는 않을까. 왜 화장실 수세장치 생산업자들은 변기에 폭탄을 설치하지 않을까. 우비를 입고 타야하는 인공비 장치를 한 택시를 왜 발명하지 않을까. 그는 자신이 느끼는 현실의 가능성의 크기와 다른 사람이 느끼는 그것의 차이에서 큰 정신적 괴리감을 겪었다. 괴리감은 그의 창작의 욕구다. 그림, 조각, 글, 영화, 보석디자인, 화장품까지 그에게 닫힌 영역은 없다.

불쾌함을 선사하오

재즈의 묘미가 즉흥연주인 이유는 안정 상태가 깨진 긴장의 스릴감 때문이다. 수많은 변수에 민감해 질 수 없는 인간은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안정을 추구한다. 마치 심장이 정상 맥박으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예측 가능한 범위를 우리는 일상, 좀 더 넓게는 현실이라 부른다.

현실로 예술품의 의미를 예측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안정을 느낀다. 예측은 가능하되 그 결과가 너무나 이상적일 때 우리는 감탄하며 아름답다고 말한다. 이렇게 암묵적으로 예술이라는 범위가 생겨버렸다. 하지만 그만큼 반대편의 세계, 무의식의 세계는 깡그리 무시해 온 셈이다. 의식과 현실이란 세계에 갇혀 사고하고 판단했다. 이 때 달리의 광기어린 천재성이 자아낸 불쾌함은 우리의 무의식을 환기시킨다. 의식과 이성의 틀을 깨닫는 순간 그의 불쾌함은 오롯이 가치를 가지게 된다. 누가 아름다운 것만이 예술이라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이화정 기자 <redreal2@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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