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고리 아래로 가슴을 드러내고 다니던 선조들이 브래지어를 착용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인 30~40년 전이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한다. 분홍색 리본 하나 수줍게 달린 속옷의 형태가 형형색색 화려한 모습으로 변신하고 있다. 속옷이 겉옷으로 옮겨왔다. 아예 속옷을 입지 않는 모습도 보인다.

눈이 부신 속옷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도심가에 색다른 속옷가게가 늘어나고 있다. 화려하고 특이한 속옷이 여성이건 남성이건 지나가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수입 속옷 브랜드 ‘에메필’ 이대지점에서 일하는 조은영씨는 “손님들이 처음에는 ‘수영복 아니냐’ 그랬죠. 하지만 점점 유행이 바뀌면서 예쁘고 독특하다는 반응이에요”라고 말한다. 어머니와 함께 쇼핑을 나온 김현미(21,대학생)씨는 여름을 맞이해 새 속옷을 구매했다. “요즘은 여름에 겉옷뿐만 아니라 속옷도 노출되거든요”라며 다양한 브래지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친구들 생일선물까지 챙긴다. 이은혜(22,대학생)씨는 “꼭 입지는 않더라고 하나쯤 가지고 싶다”고 한다.

겉옷처럼 밖으로 드러나는 브래지어 끈도 작년에 이어 인기다. 올해는 그 정도가 강해져 끈을 목 뒤로 둘러 연결하거나 아예 브래지어가 겉옷에 비치도록 착용한다. 속옷 브랜드 ‘비비안’은 이례적으로 겉옷 겸용 속옷을 선보였다. 남영 L&F 홍보실 이정인씨는 “겉옷과 속옷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어서 스커트 아래로 내려오게 입을 수 있는 슬립이나 겉옷으로 겸할 수 있는 캐미솔 톱 등을 새로 출시했다”고 설명했다.

속옷의 모습 그대로....... 하지만 겉옷이다

속옷에 대한 관심이 겉옷의 변화도 가져왔다. 티셔츠의 끝단이나 가슴선에 레이스가 촘촘히 박혔다. 소위 말하는 ‘란제리룩’이다. 내복을 연상시키는 색상에 주름과 레이스장식, 큐빅장식으로 정말 속옷 같은 옷도 있다. 스타킹도 길이가 짧아져 속옷 같던 끝부분이 그대로 드러나게 입는다. 남유진(22,대학생)씨는 “섹시한 여자가 뜨니까 이런 옷들도 인기가 있는 것 같다”고 한다. 고동훈(26,대학생)씨는 “여자친구가 속옷 같은 옷을 입었는데 예쁘고 섹시하던데요. 자주 입었으면 좋겠어요(웃음)”라고 말했다.

속옷을 겉옷으로 응용한 것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가 도입한 이 스타일은 브래지어를 겉옷 밖으로 착용한 형태로 팝가수 마돈나로 인해 유명해졌다. 여성의류 브랜드 '바닐라B' 오해정 기획이사는 올해 최고 인기 아이템으로 란제리룩의 탑을 꼽았다. “올해는 여성스러운 섹시함이 유행입니다. 속옷이 아닌 것처럼 입는데 모양은 속옷인거죠.”

속옷은 노우, 자유는 오케이~

속옷과 패션의 자유로운 접목과 함께 일각에서는 속옷을 거부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최근 들어 여자연예인들이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고 TV에 출연해 스포츠신문에는 연이어 ‘노브라’ 기사가 쏟아진다. 패션지의 피쳐디렉터 김경씨는 최근 한 주간지에 ‘전도연의 노브라를 옹호함’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해 화제가 됐다. 여성 칼럼니스트 남승희씨는 그동안 자신의 칼럼을 통해 ‘노브라’를 주장해왔다. 편하게 옷을 입을 수 있고 건강에도 좋다는 것이 지지하는 이유라고. 그는 브래지어를 입으면 옷맵시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든 여성들이 꼭 브래지어를 착용해야하는 이유는 아니라고 말한다. “탱탱한 가슴을 지닌 여성들은 그 탱탱함을 자랑할 권리가 있습니다. 왜 다리가 예쁜 여자들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니는데 탱탱한 가슴은 노브라를 못 합니까?”

한국에 비해 외국에선 브래지어의 역사가 길다. 1913년 뉴욕, 파티복에 코르셋의 윤곽이 드러나 두 장의 하얀 손수건과 리본으로 뒤가 없는 짧은 브래지어를 만들어 착용한 것이 시작이다. 브래지어를 거부한 역사도 길다. 60,70년대 페미니즘 운동과 더불어 여성을 억압하는 성, 육체에 대해 자유를 요구하고 패션에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 브래지어와 코르셋을 불태우는 화형식을 가지기도 했다.

노브라, 시선의 불편함 vs 몸의 불편함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 여성들에게 금기에 가깝다. 인터넷 검색엔진에 ‘노브라’를 입력하면 성인인증을 요구할 정도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으면 ‘칠칠맞은 여자’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윤윤희(21,대학생)씨는 “해외여행을 갔다가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는 여자를 봤는데 뚫어져라 쳐다보는 건 한국인뿐인 것 같다”고 한다. 그는 여성인 자신도 아직은 쳐다보기 민망하다며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여성을 보면 선입견을 가질 것 같다”고 말했다. 김정선(22,대학생)씨는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고 있어 하루 종일 브래지어를 착용한다. “안한다고 가슴이 쳐지는건 아니라고 들었거든요. 필수적인 속옷이 아니라면 벗어버려도 되지 않을까요”라며 브래지어에서 해방되고 싶다고 말한다. 남자들의 생각은 어떨까. 김지훈(24,대학생)씨는 노브라에 대해 “성적으로 매력 있어 보이기 위한 것 아니냐”며 미니스커트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된다고 한다. 

섹시코드와 여성해방의 정점

속옷의 화려한 외출은 두 가지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섹시함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속옷패션으로 나타나게 된 것. 반면 여성들이 속옷을 자신 있게 노출하는 것이 꺼려지지 않게 된 사회 분위기의 반영일 수도 있다. 노브라의 유행도 마찬가지다. 여성해방의 관점에서 보면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것은 여성의 목소리가 커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 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모습이 멋있고 섹시해서 그것을 따라하려는 경향이 반영되기도 했다. 이화여대 사회학과 최샛별 교수는 이 두 가지가 서로 맞물리면서 속옷을 둘러싼 여러 유행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한다. “섹시코드라는 것은 여성의 성적으로 상품화로 볼 수 있고 여성해방운동은 그것의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서로 다른 두 관점이 부딪히면서 더 강력한 사회현상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더운 여름이 다가온다. 흘러내리는 땀에, 깊게 파인 티셔츠 위로 자꾸 보이는 속옷에 고생스러운 여름이 될지도 모르겠다. 속옷도 내 멋대로 입는 시대다. 란제리룩으로 섹시하게 꾸며보자. 화려한 속옷을 살짝 보이게 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아예 벗어버리자. 시트콤 <섹스앤더시티>의 사라 제시카 파커처럼 멋있게, 혹은 내 멋대로.

 
 
손기은 기자 <choori@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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