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코너는 후보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려는 시도입니다. 지금의 지도자를 만든 요인이 젊은 시절에 있지 않을까.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취재팀은 1월 중순부터 자료를 찾았습니다. 자서전, 언론보도, 블로그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유용했지만 이런 내용만으로 기사를 쓰기가 곤란해 2월부터 직접 취재에 나섰습니다. 출마선언식, 토론회, 출판기념회…. 주변 인물도 만났습니다. 배우자, 학교친구, 회사동기, 투쟁동지, 보좌관, 정책자문단을 통해 후보의 면모를 더 파악했습니다. 유명 언론사의 정식기자가 아닌, 학생기자를 위해 많은 분이 시간을 내서 만나거나, 전화와 이메일로 취재에 응했습니다.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당의 후보선출이 막바지로 향하는 중입니다. 경선결과 못지않게 정치 지도자의 이해가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주요 후보를 모두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그에겐 질문이 항상 따라다녔다. 금수저라 불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5선 의원을 거쳐 경기지사에 당선될 때까지 남경필은 계속 답했다. 그가 대선출마 의사를 밝히자 같은 질문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당신은 금수저가 아닌가.

그 물음엔 다른 의도가 있는지 모른다. 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진 자로서 책임의식이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의도를 간파한 듯, 남 지사는 “책임 있는 금수저가 되겠다”고 강조한다. 유복하게 자란 사실을 인정하며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겠다고 공언한다.

의식화가 덜된 청년

“착실하게 공부나 해라. 데모하고 돌아다니면 부모 인연을 끊겠다.” 아버지 남평우 씨는 대학에 입학한 남 지사에게 이같이 말했다. (남경필 자서전, <시작된 미래>) 남평우 씨는 수원에서 운수업체를 운영하던 기업인이었다.

남 지사는 삼형제 중 장남이었다. 부모의 속을 썩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말에 따라 학생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가 대학에 들어간 1984년은 선배와 동기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나설 때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제 가슴 속에는 언제나 먹먹한 부채의식이 있습니다. (…) 저는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2006년 주간경향 인터뷰에서도 남 지사는 “학생운동 경험이 없다는 데 대해 채무감이 있다. 젊은 시절에 그들처럼 치열하게 고민하지 못했다는 점을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가수 안치환은 그런 남 지사의 비판의식을 일깨워주는 친구였다. 비슷한 존재가 학과에 여럿 있었다. 이정희 구리YMCA 사무총장이 그 중 한명이다.

남 지사와 이 사무총장은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84학번 동기였지만 다른 길을 걸었다. 이 사무총장은 학생운동에 적극적이었다. 1987년 이한열 씨가 시위도중 최루탄을 맞고 병원에 실려 가자, 그의 운동화를 보관했다가 이한열 씨의 어머니에게 전달한 사람이기도 하다.

“노선이 있다면 난 경필이와 반대쪽이었다.” 이 사무총장은 대학시절 남 지사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3월 10일 기자를 만났을 때, 이 사무총장은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기자의 이름과 매체(스토리오브서울)를 종이에 받아 적고나서야 입을 열었다.

“당시 부잣집 도련님들은 보통 자기랑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얘기하곤 했다. 근데 경필인 그런 게 없었다. 이념 갖고 다퉜으면 부딪혀서 갈등도 겪고 했을 텐데 안 그랬기 때문에 당시엔 더 가까워질 기회가 없었다.”
 
남 지사가 사회복지를 전공한 게 정책을 만드는 데 영향을 줬다고 보는지 물었다. “그렇게 생각한다. 사회복지라는 정서적 베이스가 없었으면 정책으로 나올 수 없는 것들이 나왔다. 경기도에서 하고 있는 따복사업(따복공동체사업)이 그 예다.”

따복사업은 본래 따뜻한 복지를 의미하다가 따뜻하고 복된 공동체라는 뜻까지 함께 갖게 됐다. 경기도는 이 사업을 통해 주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회적 경제활동을 추진하는 중이다.

과거 운동권이 관심을 가졌던, 진보적인 움직임으로 볼 수 있는데 남 지사가 이를 수용해 놀랐다고 이 사무총장은 설명했다. “덕분에 현장에서 활동하는 이들에게 좀 더 안정적인 여건이 만들어졌다. 경필이가 지금도 상대편 의견을 잘 받아들이는구나 싶었다.”

▲인터뷰에 응한 구리YMCA의 이정희 사무총장. 남경필 지사를 ‘경필이’라 불렀다.

남 지사는 대학 2학년 때, 미팅에서 만난 여학생과 1989년 결혼했다. 25살, 대학을 졸업하고 1년 뒤였다. 그리고 군에 입대했다. 서울신문에 따르면, 남 지사는 보충역으로 경기 화성시에서 18개월 복무하다가 제대했다. 보충역 사유는 비중격만곡증. 콧구멍을 둘로 가르는 벽이 휘어져 코의 기능에 문제를 만드는 질환이다.

기자의 3원칙 강조

전역 4개월 만에 남 지사는 경인일보 기자가 됐다. 아버지가 대주주인 신문사.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기자라는 직업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처음 들어갔을 때는 회장 아들이라는 오명 때문에 왕따도 당하고 불편한 시선도 많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밑바닥에서 기겠다는 각오로 겸손하게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동료 및 선후배 기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남 지사의 기자시절에 대해 들으려고 2월 3일 김학석 경인일보 정치부장을 만났다. 두 사람은 1990년 11월 5일 경인일보에 같이 입사했다. 남 지사가 입사 후 정말 왕따를 당했을까.

처음엔 따가운 눈총이 있었던 것 같지만 남 지사가 일을 열심히 하자 안 좋은 시선이 금세 사라졌다고 김 부장은 말했다. “인간성이 좋아서 동기와 선후배 모두와 잘 어울려 지냈다. 낚시 좋아하는 선배들이 주말에 낚시를 간다 하면 자주 따라나섰다.”

남 지사와 관련해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을까. 김 부장은 화성연쇄살인사건 현장을 함께 찾았다고 했다. 여중생이 숨진, 9번째 피해현장. “당시 수습이었는데, 둘 다 처음으로 사건 현장을 가게 됐다. 꽤 긴장했다. 앞으로 이런 장면 숱하게 보겠다며 서로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수습생활을 마치고 남 지사는 사회부에서 사건사고 기사를 ‘숱하게’ 쓴다. 술을 잘 못 마시고,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선배들이 냉면그릇에 소주와 맥주를 붓고 다 들이키라 했는데 남 지사가 무척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후배들이 들어오면 우리는 걔들한테 그러지 말자고 했다. 실제로 후배들이 들어왔을 때 우리가 술을 권했나, 안 권했나? 기억은 잘 안 난다.” (웃음)

남 지사는 기자의 3원칙을 자주 말하고 다녔다. 일어서면 취재, 앉으면 작성, 누우면 구상. “본분에 충실하려는 그의 다짐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 친구, 나중에 편집국장 하고 싶어 하는구나 싶었다.” 아버지 이름에 먹칠하기 싫어 열심히 하는 줄 알았는데 돌연 정치인의 길을 걷자 신기했다고 김 부장은 전했다.

“광교 횟집이라고, 테이블 몇 개 안 되는 허름한 술집이 있다. 남 지사가 기자로 일할 때 동기들끼리 자주 가던 곳이다. 한 번은 남 지사 낙선에 대비해 다 같이 거기서 술 한 잔씩 했다. 떨어져도 슬퍼하지 말라 했는데 웬걸, 정말 당선되더라.”

▲남 지사가 경인일보 사회부에서 쓴 기사들 (1991년 11월 6일과 8일자)

남 지사의 자서전에 따르면 기자시절은 세상의 어두운 면을 보고, 경제민주화에 대한 생각의 씨앗이 됐던 시간이자 인생에서 가장 피곤했던 시간이었다. 그는 언론사 경영을 공부하기 위해 1993년 미국 예일대 경영학 석사과정(MBA)에 입학한다. 29살이었다.

재학 시절엔 한인학생회장을 맡는다. 미국사회에서 그는 큰 자극을 받는다. 기부문화, 비영리재단의 운영 노하우, 빈부격차, 인종차별. 루즈벨트 대통령을 자주 언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MBA를 수료한 뒤에는 뉴욕대에서 행정학을 공부한다.

남 지사는 조카(막내동생의 딸)의 돌잔치 날을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꼽는다. 동생의 간에서 7cm 크기의 암이 발견됐는데 오랜 투병 끝에 건강을 회복해 결혼하고 자녀를 낳았다. 동생의 행복을 보며 “신의 축복”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김경미, <골을 못 넣어 속상하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일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려면 “모두가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2014년 이혼했다.

남 지사는 성장담을 담은 책을 새로 펴냈다. 제목은 <가시덤불에서 꽃은 핀다>. 2월 22일 서울 영등포구 공군회관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을 때, 남 지사는 자신의 실패에 대해 얘기했다. “제가 겉으론 이룬 게 많아 보이지만 속은 엉망진창입니다.”

아직 가시덤불 속이라면서 그는 “저도 힘들지만 저보다 훨씬 힘드실 국민들과 함께 가시덤불에서 꽃을 피워가고 싶은 마음”으로 책 제목을 정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사회를 맡은 정두언 전 국회의원은 행사를 마무리하며 “남 지사에게 어울릴 새 신붓감을 찾아 달라”고 관객석을 향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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