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法律)’이라는 단어에 음악을 뜻하는 ‘률(律)’자가 들어 있다. 법과 음악은 거리가 멀다는 통념에 뒤통수를 치는 얘기다. 말 뿐만 아니라 이것을 몸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수십 년을 가야금과 함께한 황병기 교수(68)다. 그는 전통악기를 다루면서도 전통과 현대, 서양과 동양을 넘나드는 독특한 음악세계를 가졌다.

그는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수업, 공연준비로 매일 새벽 1시를 넘겨 잠들지만 자신의 홈페이지(www.bkhwang.com) 게시판에 올라온 글마다 자신의 이름을 한글 약자로 만든 ‘ㅎㅂㄿ으로 꼬박꼬박 답 글을 달아준다.

가야금과 소리, 그리고 사람

황병기 교수가 가야금을 처음 접한 것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6.25전쟁 소식에 가슴을 졸이던 시대였다. “동아줄을 타고 우물 속에 들어가 깊숙이 감춰둔 보물을 처음 발견한 도둑놈의 심정이었다.” 50년 전 가야금을 퉁기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단다.

지금은 음악가가 되었지만 법대에 다닌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법률공부도 음악만큼이나 즐겁고 유쾌했다. 법대를 졸업하고 극장, 영화사, 화학공장, 출판사에서 일을 했다. 모두 그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아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이 중요하고,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공자의 말을 들며 음악은 자신에게 즐기는 대상이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극장, 영화, 출판 일을 하면서 가야금 연주와 작곡 발표를 위해 해외 공연까지 다녔다.

그가 모든 일을 정리하고 순수한 음악인이 된 것은 38세 때다. 38세엔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그 때 가르친 학생들은 지금도 만나고 있다. 그는 제자들을 만나면 꼭 같이 밥을 먹는다. 사람과 만나 밥을 먹으며 이야기하는 게 그의 유일한 취미다. 식구란 말도 ‘함께 밥 먹는 사람’이란 말에 나왔다며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는 만남 속에서 정(情이) 생기는 법이라고 말한다.

불혹을 넘긴 부부

황병기 교수는 국립국악원에서 부인 한말숙씨를 만났다. 가야금이 중매를 섰다. 금슬 좋은 부부로 유명해 지난 1월에는 MBC <즐거운 문화 읽기> 프로그램에 나와 참된 부부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결혼한 두 쌍 중 한 쌍이 이혼한다는 요즘, 40여년 인생을 함께한 부부의 비결은 무얼까.

그는 2층 집에 산다. 1층은 부인이, 2층에 그가 산다. 상대방의 공간을 철저히 존중하기 위한 생각에서 나온 구조다. 언젠가 소설가인 부인이 어느 잡지에 기고한 가상 유언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너희 아빠의 재혼은 안 된다. 아빠는 손이 안가는 분이시니 너희들 중 여건이 맞는 애가 아빠 가까이에서 살면 된다.” 서운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아내의 표현 자유이기 때문에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어떻게 하느냐는 자기의 자유라며, 그 때가서 재혼하고 싶으면 할 것이란다. Let it be. 상대방의 생각과 행동을 자유롭게 놔두는 젊은 사고방식이 아직도 그들 부부를 신혼처럼 여기게 만든다.

연주가 음악의 꽃

오래 앉아 인터뷰를 하던 기자의 발에 쥐가 나자 그는 대뜸 “연주자는 장시간을 연주해도 쥐가 나서 안 되고 팔이 아파서도 안 된다”는 말을 꺼낸다. 칠순을 바라보는 그지만 요즘도 날마다 3~4시간 씩 가야금을 탄다. 흔히 음악가들은 작곡을 시작하면 자연스레 연주를 멀리하게 된다. 그는 작곡을 먼저 시작했지만 연주야말로 ‘음악의 꽃‘이라며 연주의 즐거움을 버릴 수 없다고 말한다. 음악은 소리이기 때문에 작곡보다는 연주가 진짜라고. 그는 곡을 쓰는 정신보다 연주를 하는 육체가 더 신성하다고 본다. “정신은 나태하고 교활해서 힘든 것은 육체에게 떠넘기지. 그리고 육체는 하찮은 것으로 치부해버려. 공을 차는 선수가 축구의 즐거움을 알지, 코치가 축구한다고 하지는 않잖아. 백번 사랑한다는 말보다 한 번 껴안아 주는 게 진짜 사랑이야.”

‘연주자는 곡예사와 같은 기교, 투우사와 같은 신경, 그러면서 술집 마담과 같은 배짱을 지녀야 한다’는 야샤 하이페츠*의 말이 실로 뼈있는 농담이라며 껄껄 웃는다.

가야금은 내 인생의 즐거움

명리(名利)의 다툼질은 남들에게 모두 맡기어 그들 모두가 취하더라도 미워하지 말고, 고요하고 담박함은 내가 즐거워하되 홀로 깨어 있음은 자랑하지 말지니라. 이는 불교에서 이르는 바 '법(法)에도 매이지 않고 공(空)에도 매이지 않아 몸과 마음이 더 자유로운 사람'이니라.                                            -채근담

그는 지난 일에는 미련을 버린다. 고민도 하지 않는다. 고민의 99%가 과거와 미래 때문이라며 고민은 유령과도 같은 거라고 말한다. 20대에 채근담을 읽고 세운 그만의 세상 사는 방식이다. 음악에서 악(樂)은 ‘음악, 즐겁다, 좋다’를 뜻한다. 가야금과 평생을 함께한 그의 음악 인생은 그렇게 즐겁고 좋다.


 
     송나라 기자<nicenara84@hanmail.net>

*야사 하이페츠: 20세기 바이올린의 황제, 바이올린의 전설 등으로 불려졌던 러시아 출신의  미국 바이올린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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