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 퓰리처 상 수상, 뉴욕타임스의 유일한 한국인 외신기자

시침이 정확히 12시를 가리키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까만 반팔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26년 차 기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반가워요” 하는 그의 첫 마디엔 힘이 실려있었다. 경상도 억양의 차분한 말투는 간결하고 정확했다.

“내가 꼭 기자가 되겠다, 이런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그가 웃으며 회상했다. 우리나라 국제공항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기자가 됐다. 이후 코리아헤럴드와 AP 통신사에서 각각 3년, 11년씩 일하며 경력을 쌓았고, 2005년에는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의 유일한 한국 특파원 자리까지 올랐다. ‘노근리 사건’ 보도로 한국인 최초 퓰리처상을 수상한 뉴욕타임스 최상훈 기자를 12일 프레스센터에서 만났다.

- 기자가 된 계기가 특이하다.

꼭 기자가 되겠다고 생각하고 준비하진 않았다. 대학원 다닐 때 신문사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던 친구가 있었다. 코리아 헤럴드 시험 치러 가길래 나도 같이 갔다. 영자신문은 영어 시험이 중심이기에 합격할 수 있었다. 상식 시험 등 다른 준비가 필요한 다른 신문사였다면 아마 떨어졌을 것이다. 그래도 예전부터 어떤 현상을 보고 글로 다듬어 쓰는 일엔 늘 관심이 있었다. 그런 일 할 수 있는 데가 많지 않다. 그중의 하나가 기자다. 가서 일하다 보니 재밌었다.

경상남도 울주군에서 태어나 영남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최상훈은 한국외국어 대학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해 영어를 익혔다. 1991년 코리아헤럴드에 입사한 이후 기자 일에 흥미가 붙었다. 3년 뒤 AP 통신사 서울지국으로 이직했고, 역사 속에 묻힐 뻔한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

- 노근리 사건은 국내 언론에서도 이미 여러 번 다뤘던 주제다. 퓰리처상을 받은 기사는 기존 보도와 어떻게 다른가?

당시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같은 경우 한국에서 크게 화제가 되지 않았다. 주로 진보 신문이나 잡지에서 노근리 사건을 다뤘다. 사건 피해자 중 한 분이 사건을 소설 형식으로 풀어쓴 책이 있다. 국내 보도는 그 내용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 물론 피해자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도 언론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러나 기사엔 한 쪽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AP는 피해자의 주장뿐만 아니라 가해자로 지목되고 있는 미군 측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객관적인 자료도 찾아봤다. 피해자도 일부 몇 명이 아니라 광범위하게 수소문해서 인터뷰했다. 어려운 과정이었다.

‘노근리 사건’이란 1950년 한국 전쟁 중 미군이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철교 밑에서 한국인 피난민 300여 명을 무차별적으로 사살한 사태다. 1994년 피해자 정은용이 사건을 고발하는 책 <그대, 우리 아픔을 아는가>를 출간했고, 한겨레에서 기사를 실었지만 별다른 이목을 끌지 못 했다. 4년 후 AP에서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10쪽이 넘는 기사엔 피해자 6명의 생생한 증언뿐 아니라 가해자로 지목된 퇴역군인 12명의 목소리도 담았다. 1998년에 시작한 취재는 1년 6개월이 걸려 끝마쳤다. 보도 직후 미국 정부는 사건 수사에 나섰고, AP는 추가 기사를 두 번 더 내보냈다. 이듬해인 2000년도에 노근리 기사는 탐사보도부문 퓰리처상을 받았다.

▲ “노근리 사건” 보도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최상훈 기자 (자료=퓰리처상 공식 홈페이지)


- 노근리 사건을 취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한국 언론에 노근리 보도가 간간이 화제가 되고 있었다. 한국 전쟁 동안에 미군이 양민을 학살했다는 말은 사실 엄청난 주장이다. 흔하지 않기도 하고 보통 시민이 그런 의견을 내긴 쉽지도않다. 미군에 대한 특이한 주장을 하는 걸 보고 미국 언론사에 근무하는 기자로서 관심이 갔다.

- 취재거리는 항상 본인이 정하나?

대부분 내가 먼저 정한다. 외국 언론은 대부분 그렇다. 특히 뉴욕타임스는 기사 주제를 기자의 재량에 맡기는 전통이 있다. 내가 ‘이런 기사를 쓰겠다’고 통보하면 회사 쪽에서 동의하거나 추가로 아이디어를 보태기도 한다. 아주 예외적으로 ‘이 기사 예전에 우리가 다룬 적 있어’하고 지적하기도 한다. 물론 처음엔 내가 정한 취재거리가 데스크에서 거절당하기도 했다. 뉴스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언론사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 신문사에서는 무엇이 뉴스가 되는지’ 잘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광화문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최상훈 기자는 매달 평균 9건의 기사를 보도한다. 한국에서 일하는 뉴욕타임스 소속 특파원은 그가 유일하다. 혼자서 한반도의 정치, 사회, 문화, 스포츠 소식을 모두 다룬다. 이번 해에는 국내에서 큰 화제를 모았던 백남기 농민의 사망 사건을 비롯해 ‘진경준 검사 파문’, ‘김영란법 시행’, ‘옥시 가습기 사건’, ‘개 번식 농장 실태’ 등 묵직한 뉴스를 세계에 알렸다.

▲ 뉴욕타임스를 통해 보도된 최상훈 기자의 한국 기사. (오른쪽 위부터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 김영란법 시행, 개 번식 농장 실태)

- 코리아헤럴드와 AP 통신사, 뉴욕타임스를 거치며 경력을 쌓았다. 세 회사의 차이점이 있다면?

가장 큰 차이점은 기사 주제를 정하는 주도권이다. 코리아헤럴드에서 일할 땐 부장이 취재거리를 정해주는 성향이 강했다. AP 통신사의 경우 대부분 속보를 중심으로 보도하기 때문에 딱히 주도권이랄 게 없다. 그러나 미국 언론사는 대부분 기자에게 먼저 무엇을 쓸 건지 물어본다. 이런 이유도 있다. 코리아헤럴드의 경우 부장이나 국장이 한국에 같이 있다. 즉, 에디터들이 한국의 상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기자에게 무엇을 쓰라고 시킬 수도 있고, 주제의 뉴스 가치도 빨리 판단할 수 있다. AP 통신사는 서울에 지국이 있다. 그래도 지국장이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경우가 있다. 뉴욕타임스는 아무도 없다. 나 혼자다. 혼자 파악해서 좋은 아이디어를 골라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본사에선 신뢰하며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을 신중하게 뽑는다.

대신 코리아헤럴드의 경우 신문사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아 젊은 기자에게 주어진 기회가 많았다. 큰 신문사의 경우 지면은 정해져있는데 기자가 많으니 처음 시작하는 기자가 자기 이름 달고 기사 쓸 기회가 없다.

- 뉴욕타임스 기사는 어떤 편집 과정을 거치나?

뉴욕타임스는 기자보다 편집하는 인력이 더 많다. 본사에 기사를 보내면 에디터들이 읽고 검토한다. 그런데 기사를 확 뜯어고치진 않는다. 대신 기자에게 계속 질문을 던진다. ‘기사에 이런 내용을 포함해 넓게 다뤄보면 어떻겠냐, 이 부분이 특히 재밌는데 여기에 중점을 두고 더 깊게 써보면 어떻겠냐,’ 등의 제안을 하기도 한다. 질문을 감안해 기사를 수정하고 나면 최종적으로 교열을 손본다. 회사마다 고유한 보도 스타일에 따라 대소문자와 맞춤법을 고친다. 단어의 오류만 꼼꼼히 체크하는 담당도 있다. 예를 들어 ‘간첩’이란 단어를 썼을 때, 담당자는 “이 사람을 진짜 간첩이라 부를 수 있어? 간첩 혐의자로 분류해야 하는 것 아니야?”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 시간이 오래 걸리겠다.

시간 여유의 차이지 모든 기사는 똑같은 과정을 거친다. 속보 기사의 경우 정말 후다닥 나가야 한다. 바쁠 땐 1시간 안에 천 단어 이상의 기사를 취재하고 쓰고 검증까지 한다. 시간 내에 중요한 전화 돌려서 묻고, 역사적인 맥락과 배경도 분석해야 한다. 북한에서 핵 실험을 하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다. 핵 실험 소식을 접하고 나면 바로 독자적인 확인에 들어간다. 기상청, 국방부 등 각 기관에 연락해 사실을 확인한다. 그 다음엔 왜 이게 뉴스인지 설명해야 한다. 국내 언론이라면 ‘북한에서 인공지진이 일어났다’고만 써도 기사가 된다. 그러나 외신은 왜 인공지진이 일어났는지, 핵 실험 뒤엔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함께 전달해야 한다. 맥락을 읽고 사실을 파악해 최대한 빨리 기사를 쓴다. 이런 경우 편집도 몇 분 안에 끝난다. 속보 보도는 굉장히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 속보 쓰는 실력은 기자의 자질을 평가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2016년 1월 1일 부터 9월까지 최상훈 기자가 보도한 83건의 기사 중 북한 뉴스는 48건에 달한다. 특히 올 한 해는 북한의 잇따른 핵, 미사일 실험으로 인해 속보가 쉴 새 없이 터졌다. 도발 때마다 그의 기사에는 실험 날짜, 위치를 비롯해 주변국들의 대응, 실험 배경, 전문가들의 설명이 자세히 실렸다. 한반도 정세를 소상히 알린 공을 인정받아, 그는 2010년 스탠포드 대학 아시아 태평양연구센터의 한국학 선임 연구원으로 영입되기도 했다.

- 한국에서 일하는 한국인 외신기자로서 장단점이 있다면?

외국에서 온 기자들은 한국 사회의 특이한 점을 금방 잡아낸다. 이상한 점, 특이한 점, 좋은 점 등. 그런데 한국에 오래 살다 보면 그 특이점이 특별하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간단한 대상도 수 십 가지 다른 측면으로 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기삿거리를 놓치기도 한다.

장점도 있다. 주제에 대해 외국인이 쓴 기사보다 훨씬 정확하게 이해하기도 하고, 가끔 외국인이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을 잡아내기도 한다. 양쪽 다 장단점이 있기에 둘 다 훈련을 해야 한다. 한국인 외신기자는 도저히 기삿거리로 보이지 않는 것도 외국 언론의 시각으로 찾아내는 연습을 해야 하고, 외국인 외신기자는 한국 사람처럼 우리 문화의 깊은 맥락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취재 아이디어는 주로 어디서 얻나?

당연히 신문을 열심히 본다. 국내 언론을 항상 살핀다. 길을 돌아다니면서도 “저게 기삿거리일까, 아닐까?” 생각한다. 기사 주제가 정해지고 나면 평소엔 안 보이던 것도 눈에 들어오고 기사와 연관짓게 된다. 만약 어떤 젊은 사람이 핸드백을 사고 싶다고 생각하면 길거리에서도 핸드백만 눈에 보일 것이다. 기자도 똑같다.

최상훈 기자는 매일 아침 두 개의 일간지를 읽는다. 요즘은 주로 웹사이트를 통해 뉴스를 본다. 기사 보는 데 시간이 꽤 걸린다. 정보를 기억해가면서 꼼꼼히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기자들은 신문 재미로 안 읽는다”며 웃었다.

- 외신기자의 시각에서 본 국내 언론의 특징이 궁금하다

국내 언론은 굉장히 정의감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성격이 강하다. 무슨 사건이 벌어지면 모든 언론이 나서서 ‘왕창’ 이렇게 몰아세운다. 그래서 잘못을 저지른 정치인이나 정부가 움직일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장점이 있다.

단점은 언론사들이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갈라져 있는 점이다. 보수 신문에선 진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진보 신문을 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또 하나 단점은 기사에 익명 취재원이 너무 많다. 익명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는 경우, 상당 부분은 정말 사실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가끔은 익명으로 할 필요가 없는 내용인데도 정보원의 신원을 가리고 내보낸다. 오히려 이름을 걸고 말해야 할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익명을 사용한다. 물론 익명을 꼭 써야 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내부고발자를 비롯한 특정한 소수의 입장을 보호할 땐 익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외국 언론사의 경우 익명을 쓸 수 있는 기준이 굉장히 엄격하다. 국내 언론과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다.

- 뉴욕타임스 기자의 하루 일과를 소개해달라.

아침엔 일어나자마자 이메일부터 체크한다. 회사로부터 다양한 메일이 온다. 일어나는 대로 간밤에 발생한 사건을 확인 해달라거나, 내가 쓴 기사의 최종 편집본을 검토하라고 하기도 한다. 편집한 기사에 아직 고칠 내용이 있으면 빨리 답신을 보낸다. 뉴욕타임스는 기사를 내보내기 전에 항상 기자들에게 최종 승낙을 받는다. 메일 확인이 끝나면 식사하며 신문을 읽는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 조금 천천히 출근한다. 대신 퇴근 시간이 늦다. 인터내셔널 뉴욕타임스의 마감시간에 맞춰 오후 6시 전까지 기사를 보낸다. 큰 뉴스의 경우 자기 전까지 계속 일하며 웹사이트에 기사를 올리고 업데이트한다. 서울 기준으로 아침 6시 정도가 되면 미국 뉴욕타임스도 마감한다. 그래서 자고 일어나면 마감 직전 회사에서 보낸 메일이 많이 와있다.

“대답이 충분한가요?” 인터뷰가 끝나고 묻는 그의 한 마디에서 배려가 느껴졌다. 영어 공부의 비결을 묻는 기자의 마지막 질문에 그는 “끈기”를 답했다. “모든 일은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래서 끈기가 중요합니다. 세상에는 잘 생긴 사람, 친구가 많은 사람, 돈이 많은 사람, 다양한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원하는 바를 이룬 사람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것 같아요.”

▲ 뉴욕타임스 최상훈 기자 (자료=스탠포드 대학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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