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일본으로부터 모진 일 겪었다… 그러니 당신들(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도 이만하면 받아들이라”

어버이연합이 12․28 위안부 협상 찬성 집회에서 내지른 일성이다. 갈등의 현장마다 자리하는 어버이연합의 회원 수는 아무리 많아봤자 2000명이다. 그런데 어버이연합의 존재감은 실체보다 과대평가 돼있고 더군다나 정체성은 진정 ‘어버이’를 대표한다고 보기 어렵다. 무엇보다 이들이 말하는 내용은 적대적이며 그 칼날은 사회적 약자를 향한다.

문제는 언론도 어버이연합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쓴다는 것이다. 한쪽의 입장을 다루면 그 반대 입장도 다뤄야 한다는 일종의 저널리즘적 강박이 근원에 있다. 사안의 좌우상하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을 모두 다뤄주면 좋은 보도일까? 그것이 정론으로서의 기능을 다 한다고 할 수 있을까?

위와 같은 보도는 기계적․양적 균형성은 갖췄을지 몰라도 공정하다고 할 순 없다. 이런 기사를 들여다보면 다들 자기 할 말을 했을 뿐 잘못한 사람은 없다. 또 기사의 결말엔 양쪽이 대립했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싸움만이 남는 것이다. 논쟁이 되는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 협상은 제대로 된 것인지, 왜 이런 갈등이 초래됐는지에 대해선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상당수 언론이 객관성과 균형성의 신화에서 헤어 나오지 못 하고 여기서 공정한 보도가 담보 된다 믿는다. 이렇게 ‘기레기’라는 오욕의 점철이 시작된다.

그래서 지금 한국 사회는 기자 서화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화숙은 1982년에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이후 여론독자부, 문화부 부장을 거쳐 현재는 편집위원으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또 많은 이들은 ‘뉴라이트를 박살낸 한국일보 서화숙 기자’라는 제목의 유튜브 동영상으로,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팟캐스트로 그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지난 2014년 7월 14일, 대한문에 섰다. 세월호 사건을 진심으로 우려하는 사람들이 점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이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시민이 돼주셨으면 싶습니다. 호락호락하지 말자, 옳은 편의 손만 잡을 게 아니라 우리 더 싸우기까지 할 줄 알자, 이런 제안을 합니다. 그 싸우는 방법 중 하나가 나쁜 놈은 나쁜 놈이라고 확실히 외쳐줄 줄 아는 겁니다.”

유족과 정부 입장 사이에서 기계적 균형을 맞추던 당시 언론들의 보도는 결과적으로 옳지 못한 것이었다. 살리지 못한 것은 명백한 잘못인데 그걸 묻는 것이 객관성을 잃고 중립성을 지키지 못한 나쁜 보도라고 착각했다. 공방만을 다루니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월호 문제는 해결되지 못 했다. 이에 대해 당연한 정부의 책임을 묻는 것이 언론이었어야 한다고 서화숙은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무조건 양쪽을 비난하는 양비론에서 벗어나 확실히 편들 것은 편든다. 그의 편은 사회적 약자, 소수자…. 이것이 가능한 건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결정이 누구보다 팩트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 어설픈 기계적 중립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

특정 입장에 서는 것은 일견 편향된 보도라고 볼 수 있지만 애초에 완벽한 중립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검경의 유병언 수사 결과를 그대로 보도하는 것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일까? 결국 정부가 제시한 의제와 목소리를 확성기처럼 확장시켜주는 모양새인데 말이다. 서화숙은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해관계자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쓰는 것이 객관보도가 아님을, 약자의 입장에 서는 것이 편향된 것이 아님을 말이다.

서화숙이 2014년에 반년 동안 연재했던 [서화숙의 집이야기] 기사는 그의 철학이 그대로 녹아있다. 대부분의 언론은 집에 관한 한 유독 특정인의 입장에서 기사를 쓴다. 공급자와 투자자의 입장이 그것인데 이것은 분명히 대한민국 평균의 입장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의 ‘집이야기’란 대게 그런 것이다. 반면 서화숙의 기사는 재개발 현장, 부실시공사, 소통 없는 아파트 주민들, 재건축 부채질하는 지자체를 주제로 한다. 또 기사에서 그는 법의 허점으로 보호받지 못한 입주자, 불법 재개발을 막으려 고분분투하는 주민, 지하에 사는 아동청소년의 입장을 경청한다. 그들의 입장에서 서술한다. 하지만 재개발 지상주의를 외치는 시공사, 이와 결탁한 지자체, 주거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법체계는 차가없는 비판을 받는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이제 언론이 특정 사안을 파고들면 편향적이며 사회 갈등을 조장한다고 손가락질 받는다. 그러나 진정 손가락질 받아야 하는 건 갈등을 중계하듯 전하고 결국 둘 다 잘못이라며 뒷짐 지는 보도 행태, 그리고 이것을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고 믿는 언론관이다. 기자가 사안에 개입하는 순간 편향적이란 소리를 듣지만 직접 발을 담그지 않는, 즉 현장취재 없는 기사야말로 가장 나쁜 기사다. 때문에 그는 기사 속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듣고 질문한다. 또 단순히 지적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공생할 수 있는 대안 사례를 발굴한다. 그렇게 대립하는 자들을 공론장으로 이끈다. 그리고 대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한다. 이런 보도도 기자가 개입했기 때문에 편향적이고 따라서 나쁜 보도라고 할 수 있나.

 역설적으로 ‘편향적’인 서화숙에겐 성역이 없다. 이완구 국무총리 후보자가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기자들에게 외압을 가하는 내용의 녹음 파일이 공개돼 파문이 일었던 적이 있다. 그는 이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한국일보가 기자의 취재활동을 보호하지 않자 자사를 향해서도 재지 않고 쓴소리를 했다. (PD저널, 2015년 2월 11일, <이완구 후보와 부당한 동맹>)

그러나 약자의 입장에 선다 해서 그가 취재원을 대하는 태도가 특별히 더 유하다거나 온정적인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 냉철하고 사실에 기반 해 취재를 하기에 누가 진정한 약자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2011년 여름부터 2013년 말 까지 2년 넘게 게재한 인터뷰 기사를 보면 이런 태도가 잘 나타난다.

때문에 서화숙은 누구보다 팩트에 강한 기자다.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뉴라이트를 박살낸 한국일보 서화숙 기자’영상 속 서화숙은 반박할 수 없는 팩트만을 가지고 자신의 논지를 전개한다. 그래서 상대방도 궤변을 늘어놓지 못하게 만든다. 이것이 중립성의 신화에 빠져있는 현재의 언론이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객관적인 보도는 좋은 보도이고 편향적인 보도는 나쁜 보도인가? 그렇다면 약자에게 상처 주는 말도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객관적인 보도이고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는 것이 편향적인 보도인가?

상황이 이렇다면 서화숙은 차라리 ‘편향적’이란 수식어를 택할 것 같다. 그리고 그 궤적을 지켜본 바, 그게 더 공정한 길임을 독자는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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