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준승 플래니토리 대표 인터뷰

페이스북을 보던 중 눈길을 끄는 광고를 발견했다. “대학교재를 맡기면 수익금이 생기는, 신박한 대학교재 공유서비스!” 종강 후에는 펼쳐볼 일 거의 없이 공간만 차지하는 책들을 맡기고 돈까지 벌 수 있다니. 많은 학생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서비스였다. 호기심에 ‘빌북’이라 쓰여 있는 파란색 아이콘을 눌러봤다. 지난해 8월 런칭한 스타트업 ‘플래니토리(Planetory)’의 페이지로 연결됐다.

‘빌리다’와 ‘Book(책)’을 결합한 말인 빌북은 플래니토리의 ‘공유형 대학 교재 대여 서비스’다. 남는 공간을 빌려주는 ‘에어비앤비’처럼 노는 교재를 나눠 쓰는 일종의 공유경제로 볼 수 있다. 학생들은 더 이상 쓰지 않는 교재를 빌북에 최장 5년 간 맡기거나(keeping·키핑) 즉시 판매할 수 있다. 또 필요한 교재는 불법제본보다 저렴한 가격(정가의 25~40%)에 대여할 수도 있다. 교재를 키핑한 회원은 자신의 책이 대여될 때마다 정가의 10%를 받는다. 인기 있는 교재라면 판매보다 키핑하는 편이 훨씬 이득이다. 책이 10회 이상 대여될 경우 정가보다 많은 금액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교재를 맡기거나 빌리는 과정은 간단하다. 우선 빌북 홈페이지(http://www.bilbook.kr)에 접속해 왼쪽 상단의 ‘빌리기’와 ‘키핑/판매하기’ 중 원하는 메뉴를 클릭한다. 키핑/판매의 경우 화면 중앙에 있는 창에 교재의 ISBN(국제표준도서번호) 13자리를 입력하면 판매 가능여부와 제안된 매입가를 알 수 있다. 이를 고려해 교재를 판매할지 맡길지 선택, 신청하면 된다. 책은 택배로 보내면 되고 비용은 빌북에서 부담한다.

교재를 대여할 때 역시 교재의 제목이나 저자, ISBN번호 중 하나를 입력해야 한다. ‘맨큐의 경제학’을 치니 총 78권의 책이 검색됐다. ‘대여가능’으로 표시된 책을 선택하면 대여금액과 보증금(책을 맡긴 사람은 면제)을 안내하는 화면으로 연결된다. 해당 페이지에서는 교재를 촬영한 영상을 통해 책 상태도 미리 확인할 수 있다. 배송지 주소와 보증금을 환급받을 계좌를 입력하고 대여료까지 결제하고 나면 택배를 기다리는 일만 남는다. 이번에도 배송료는 무료다. 

지난 19일 아침 경기도 성남 판교테크노밸리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 8층 플래니토리 사무실에서 ‘빌북’을 만든 이준승 대표를 만났다. 플래니토리는 작년 12월 10대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1등으로 이 사무실의 입주권을 얻었다. 청바지와 모자티를 입은 편안한 차림의 이 대표는 “신학기를 앞둔 요즘은 매일 500~1000권씩 책이 들어온다”고 말했다. 그의 일과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에 위치한 빌북 도서창고에서 시작된다. “열시부터 밤 열한시까지 계속 책 정리만 해요. 원래는 아침도 못 먹는데 그래도 오늘은 인터뷰 덕에 먹네요.”

▲인터뷰를 진행한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이준승 대표의 모습 (기자 촬영)


하고 싶은 게 없어 고민이던 청년, 시리아 여행에서 답을 찾다

학창시절 내내 “하고 싶은 게 없다”는 고민이 이준승 대표를 괴롭혔다. 사람 보는 눈 있는 몇몇 친구들이 “넌 왠지 사업하면 잘 할 것 같다”는 말을 하곤 했다. 하지만 정작 이 대표는 창업에 뜻이 없었다. 학사과정을 졸업하고 고려대 경영대학원에 진학했지만 고민은 풀리지 않았다. “그거 아세요? 대학원에서 석사과정 학생들이 하는 일 중 대부분이 복사예요 복사. 이럴 거면 이름을 복사라고 하지 왜 석사라고 하냐는 푸념이 나올 정도였다니까요.” 진지하게 자퇴까지 고민하던 그에게 우연히 교환학생 기회가 찾아왔다.

여기서 인생의 첫 번째 터닝포인트가 찾아온다. 바로 독일 MBA 교환학생을 마치고 귀국 직전에 떠난 시리아 여행이다. 터키와 시리아의 국경에서 3일을 버텨 비자를 받아내고 요르단과 이집트까지 가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 인생의 방향을 잡았다고 했다. “여행은 고독해요. 스스로와 대화 할 시간이 많죠.” 그 때 그가 내린 결론은 “죽기 전에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자”는 것이었다. 무작정 해외에서 일해보기로 결정한 이 대표는 귀국하자마자 중국 내 설립된 디지털 마케팅 회사인 ‘펑타이(PENGTAI · 구 오픈타이드차이나)’에 입사했다.


억대 연봉의 30대 임원, 사내벤처에서 ‘내 회사’를 꿈꾸다

이준승 대표는 회사에서 3년 간 컨설팅 업무를 보다가 세계여행을 가기 위해 사표를 냈다. 대표가 그를 만류하며 1년 휴직을 권했다. “직장인이 사표내고 세계여행을 떠나는 건 정신병이다. 그러니까 그만두지 말고 병가를 가라.” 농담이 섞인 부탁이었다.

그렇게 7개월간 중국 북경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까지 육로로 여행하고 돌아온 2007년, 그에게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홍콩에 건너가 법인을 만들고 해외 시장을 개척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만든 홍콩 법인은 1년 만에 직원 100명 규모로 성장했다. 이어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펑타이의 한국법인을 설립해 또다시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이를 발판으로 이 대표는 2013년 1월, 37세의 젊은 나이에 임원급인 해외사업본부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남들은 억대 연봉 받는 임원 자리를 왜 박차고 나왔냐며 의아해하지만 그의 창업 욕구는 오히려 이 시기에 선명해졌다. 그가 이제껏 가장 잘 했다고 생각하는 일은 한국 법인을 세워 질 좋은 일자리 100개를 만든 거다. 하지만 임원직까지 올라가도 원하는 인사정책을 쓸 수가 없어 답답했다.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회사 내에서 다른 기업을 상대 하는 B2B(Business to Business) 사업이 ‘내 일’같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제가 뭔가를 하면 소비자로부터 즉각 반응이 오는 저만의 B2C(Business to Consumer)사업이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가 주도한 법인들이 연이어 성공을 거두며 창업에 대한 자신감도 붙었다. 이 대표는 “회사 안에서 회사를 만드는 일을 했으니까 남들보다 연습게임을 많이 한 셈”이라며 “창업을 도박에 비유하면 이때는 남의 돈으로 도박을 했던 거고, 지금은 제 돈으로 한다는 차이 정도가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플래니토리 창업과 대학교재공유서비스 빌북

지난해 5월 이 대표는 이전 직장의 동료였던 기획자와 함께 퇴사해 플래니토리를 창업했다. 곧 개발자 한 명이 추가 합류하면서 세 명의 초기 멤버가 구성됐다. 이들은 창업카페를 전전하며 사업 아이템을 고민했다. 기본적으로 초기 자본금 1억 5000만원으로 시작할 수 있는 B2C 사업이어야 했다.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3가지 조건이 덧붙여졌다. 우선 남의 고통을 줄여줄 수 있는 일, 즉 painkiller(진통제 · 고통분담) 역할을 하고 싶었다. 또한 frequency(사용 빈도)도 높아야 했다. 마지막으로 cash flow(현금자산 유입)가 활발하기를 원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만족시킨 사업 아이템이 바로 빌북이었다. 미국에는 대학교재를 빌려주는 서비스가 10개 정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새 교재를 구입해 빌려주는 식이라 책 구입비를 충당하지 못해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나스닥 상장까지 한 선두기업 ‘Chegg’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기업의 사업모델을 그대로 적용하면 감가상각비 탓에 실패할 것이 분명했다. 플래니토리의 초기 멤버 셋은 긴 회의 끝에 ‘공유경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학생들이 안 쓰는 책을 구입해 저렴하게 빌려주자”는 초창기 사업모델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플래니토리는 작년 2학기에 고려대에서 빌북의 베타서비스를 실시했다. 개강 초 3주 동안 고려대 정치경제대학 건물 로비에서 학생들의 교재를 실제로 매입해 빌려준 것이다. 21일 간의 시범운영 기간 동안 학생 86명이 200권의 책을 팔았고, 222명이 책을 대여해갔다. 충분한 수요는 확인됐지만 중고책을 구입하는 비용도 여전히 대여료보다는 비싸다는 게 문제였다. 그 때 이 대표의 머릿속에 언젠가 읽었던 신문기사의 내용이 떠올랐다.

“에어비앤비, 가장 큰 기업이지만 자기 집 하나 없죠. 페이스북, 가장 큰 플랫폼이지만 자기 콘텐츠 없죠. 우버, 가장 큰 택시 업체지만 자기 차는 없잖아요. 아 우리도 가장 큰 교재 회사지만 교재를 소유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책을 위탁받고 대여 수익을 주인에게 나눠주는 ‘키핑 제도’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 대표는 키핑제도를 초기 사업모델에 덧붙여 지금의 빌북 서비스 체계를 완성시켰다.


기존 산업 위협하는 공유경제, 상생 위한 무한 고민

플래니토리는 올해 1학기부터 빌북 서비스 대상을 전국 395개 대학의 대학생 327만 명으로 확대한다. 대여 서비스 오픈(2월29일) 전이었던 인터뷰 당시는 학생 회원들로부터 키핑할 대학교재를 받아 정리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 대표는 “현재 창고에 들어온 책은 총 만 권정도고 종류는 7천종 가량 된다”며 “3월 중 2만 권을 넘길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런칭 첫 해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빠른 속도다. 최대 5만 권의 책을 보관할 수 있는 도서창고도 올해 하반기 중 500평 규모로 확장 이전할 예정이다. 투자유치도 활발하다. 올 초 두 명의 엔젤투자자가 플래니토리에 1억5천만 원을 투자했고, 정부로부터 3억 원의 추가 투자가 있을 예정이다.

▲개강 전(대여서비스 시작 전) 매일 이 정도의 책 택배가 배송된다. 종종 간식과 손편지가 들어있는 박스도 있다. (본인 제공)

사업은 순항 중이지만 이준승 대표의 고민은 끝나지 않는다. 그는 “이 일을 하면서 가장 큰 고민은 ‘공유경제가 과연 선인가’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유경제에는 장점이 많다. 하지만 종종 기존 산업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이 대표는 사업 초기단계부터 빌북이 가뜩이나 힘든 출판업계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하지만 자체 시뮬레이션 결과 그리 큰 타격을 주지 않는다는 결론이 도출돼 일단 사업을 진행했다. 그는 “아무리 싸게 해줘도 우리 서비스를 쓰지 않을 사람은 안 쓴다”고 말했다. 책을 사서 보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은 학생들, 필기를 포기할 수 없는 학생들, 또 빌북 서비스를 신청하는 과정이 귀찮은 학생들은 계속 교재를 사서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빌북을 사용할까. “책이 필요한데 사기는 아까워서 불법 제본을 하는 학생들이 있잖아요. 우리는 이 학생들을 잡으려고 하는 거죠.”

그래도 여전히 학교 서점과 근처 제본 업체에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이 대표는 이들과의 협력 방안을 고안했다. 첫 번째는 교내 서점을 위한 ‘캠퍼스 바이백(Campus buy-back) 프로그램’이다. 대여하려는 책이 빌북에 없을 경우 우선 학교 서점에서 책을 구매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학생이 한 학기동안 잘 공부한 뒤 책을 빌북에 반납하면 구매비용 전액을 돌려주는 제도다. 또 하나는 제본 업체와의 상생 방안이다. 빌북은 학교 앞 제본업체와 제휴해 학생들이 학기말에 대여한 책을 이곳에 반납하면 한꺼번에 모아 건네받는 제도를 만들었다. 학생은 반납이 편리해져서 좋고, 빌북은 택배비를 아껴서 좋고, 제본업체는 지급되는 권당 수수료로 손해액을 일부 보전할 수 있어서 좋다.

“저는 빌북이 모두에게 윈윈(win-win)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준승 대표는 인터뷰 중 ‘상생’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우리 서비스를 대학생을 도와주는 ‘선(善)’으로 보는 시각을 가장 경계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공유경제가 과연 선인가’에 대한 고민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또 공유로 인해 발생하는 풍선효과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멈추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인터뷰 이틀 전인 17일 대통령 주재로 열린 ‘제9차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정부는 공유경제 활성화를 위한 규제완화 계획을 발표했다. 그 때문인지 공유경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인터뷰 중간 중간 이준승 대표의 휴대폰이 바쁘게 울렸다. 지상파 방송사 기자의 취재요청 전화였다.

정부의 규제개선 정책이 시행되고 나면 한국의 공유경제 시장은 날개를 달고 더욱 빠르게 확장될 것이다. 기대만큼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기존 사업자의 폐업과 실업이 증가할 것이라는 걱정에서다. 그래서 이준승 대표의 고민이 더욱 가치 있게 느껴졌다. 기존 사업자와 상생하며 건강하게 성장하는 대한민국 공유경제의 미래를 그려본다.

저작권자 © 스토리오브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