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2학년 최예지(21) 씨는 마냥 즐거웠던 1학년 때와는 달리 최근 들어 많은 생각과 고민에 휩싸여 지낸다고 말한다. 사회과학부로 입학한 최 씨는 올해 초 경제학과로 전공을 결정했다. “전공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니, 내가 생각한 ‘경제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어요.” 요구되는 지식의 수준 또한 버겁다고 한다. 전공에 대한 최 씨의 불확신은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번졌다. “내가 하고 싶은 건 어떤 건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건 아닌지에 대한 걱정으로 수많은 밤을 지새워요.” 최 씨는 2학년이 되면서 부쩍 우울하거나 자신이 한없이 작은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많다고 한다. 

최 씨처럼 급격히 고민이 많아지는 대학교 2학년생의 심리를 ‘대2병’이라는 신조어로 표현한다. 이 시기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본격화하는데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이 동반되곤 한다.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을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는 시기를 뜻하는 ‘중2병’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대2병의 주요 원인으로는 급속한 경기침체에 따른 취업난이 꼽힌다. 지난 3월 16일 통계청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청년 고용률은 58.7%로 작년 1월 이후 가장 낮았다. 15세~29세 청년실업률 역시 조사를 시작한 1999년 6월 이후 가장 높은 12.5%를 기록했다. 실업률이 가파른 속도로 상승하고, 취업난이 심각해지면서 대학생들이 진로 걱정을 시작하는 시기가 점점 더 앞당겨지고 있다.

▲3월 16일 통계청에서 발표한 전체 실업률. 작년 2월 이후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대2병 콘텐츠까지 만들어져

대2병 증세를 경험하는 대학생들이 많아지면서 이와 관련한 각종 콘텐츠들도 만들어져 대학생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작가 경아(필명)가 네이버에 연재하고 있는 <핑크툰>이라는 대2병 관련 만화 역시 한 컷 당 공감 수가 300개에 달하고, 댓글도 100개가 넘는 등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그는 자신이 대학교 2학년으로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방황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만화를 그린다. 당차게 미대로 전과했지만 2학년이 되면서 점차 전공에 대한 확신을 잃어갔고 한 학기 내내 우울했다. 우울함을 떨치기 위해 찾아간 디자이너의 강연은 그에게 상대적 박탈감만을 안겨줬다. 그의 능력은 너무도 특별해 보였고,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경아 씨는 자신과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독자들과 공감하고, 조금이나마 그들을 위로하고 싶었다. “내 전공이 맞는 건지 회의감이 들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더라구요.”

▲ 핑크툰 9화 <미대생의 대2병>. 대학교 2학년들의 고민을 만화로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고경아 제공)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대2병

이화여대 시사 웹진 동아리 ‘DEW'가 지난 2월 1일부터 15일까지 전국 대학교 2학년 2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2병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는 응답자가 57%였고, 이 중 실제로 대2병을 경험한 적이 있는 학생은 66%에 이르렀다. 설문조사에 응답한 학생들은 대부분 학과를 정할 때 무기력함을 느낀다. 응답자 A 씨는 “꿈을 향해 열심히 노력하는 친구들과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갈팡질팡하는 나 자신을 볼 때마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응답자 B 씨는 “기업에서 인턴 모집 하는 글을 보면서 거기에 요구하는 스펙이 못 미칠 때 굉장히 비참해져요”라고 말한다. 대2병을 경험한 적 있다고 답한 학생들 중 약 87%는 우울함, 무기력함, 이유 없는 화남 등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높은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해…

자신이 대2병을 겪고 있다고 느끼는 이혜주(22, 여) 씨는 취업이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현실이 대2병의 원인이라고 이야기 한다. “나보다 스펙이 빵빵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취업에 실패하는 걸 보면서 걱정만 커져요. 나는 저 사람보다 토익점수도 낮고, 스펙도 없는데... 라면서요.” 이 씨처럼 대2병을 앓고 있다고 답한 대학생들은 대2병의 가장 큰 원인으로 불확실한 미래를 꼽았다. 진로에 대한 고민, 어려운 취업난, 삭막한 현실에 대한 자각 등이 뒤를 따랐다.

주입식 교육으로 인해 학생들이 대안적인 세상에 대해 상상할 힘이 없다는 점도 대2병을 키우는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이화여대 호크마 교양대학 이은아 교수는 “수동적인 과거의 틀을 깨고, 시대를 향해 나아가는 패러다임의 전환은 필요합니다. 그냥 ‘과감하게 세상이 변하는 구나’, ‘조금은 미숙해도 앞으로 달려보자’라는 용기를 가져보면 좋겠어요.”

강남 성모병원에서 근무하는 전문 상담사 김태원(29) 씨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남의 의견에 의해 좌우되고 이는 ‘꿈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특기가 무엇인지 등 자신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함께 나누는 것만으로도…

비슷한 고민을 가진 친구와 함께 고민을 나누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화여대 심리극학회 이화 사이코드라마는 고민이나 갈등을 말과 행동으로 풀어내는 즉흥극을 연습한다. 주된 소재는 친구와의 관계, 애인과의 갈등, 부모님과의 문제, 진로 문제, 학업 문제 등이다. 회장 김채현(22) 씨는 심리극을 통해 고민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고, 고민을 들어줄 친구가 있다는 점에서 큰 위로가 된다고 말한다.

심리극은 몸풀이, 마음풀이, 본극, 쉐어링(sharing)순으로 진행된다. 마지막 ‘sharing 단계’에서는 주인공의 고민에 대한 관객들(동아리원들)의 솔직한 공감이 형성된다. 김 씨 역시 처음 동아리에 들어왔을 때 한창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대학 2학년이었다. “누구한테 쉽게 말하지 못했던 고민들을 함께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그 자체로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었죠.”  ‘조언이나 충고’를 하지는 않는다. 서투르게 조언을 하다보면 고민이 개인의 탓으로 여겨지고, 마음의 병이 더 심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 심리극에 참여해 고민을 친구들과 함께 나누는 것도 대2병의 좋은 극복 방식이다. 이화여대 심리극학회 사이코드라마 회원들. (사진 김채현씨 제공)

극복을 위해…관찰하고 행동하기

전문 상담가 김태원(29) 씨는 무엇을 했을 때 행복하다고 느끼는지 스스로 잘 관찰해보라고 조언한다. 만약 행복이 추상적인 느낌이라면 대신 더욱 구체적인 감정인 ‘자신감’, ‘뿌듯함’, ‘편안함’ 등을 느껴보는 것도 좋다. 또한 두려워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결과가 별로거나 실패를 해도 괜찮습니다. 내가 무능하거나 연약하다는 점이 입증된 것이 아니라 이후의 선택을 더 정교하게 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나 꿈에 대해 완벽한 결정을 내리지 않아도 괜찮다. 어차피 결정이란 무의식적인 욕망, 사회적 맥락이나 가족들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때가 많기 때문에 합리적인 결정이란 없다고 김 씨는 설명한다.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고민이라는 어린 아이와 함께 손잡고 달래주며 같이 길을 간다고 생각하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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