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200, 300명은 물어봐요. 한 시간으로 치면 20-30명.”

고속터미널 역은 3,7,9호선 환승역이다. 고속버스터미널로 연결되고, 인근에 유명 백화점과 병원이 있다. 역 안, 개찰구 바로 앞에 위치한 옷 가게에서 일하는 허모(54.여) 씨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 가게는 개찰구 앞이라, (개찰구를) 나오면 꼭 여기에 와서 물어봐요. 여기서 일하니까 여기를 잘 알겠다 싶은가 봐.”

지하철 역내 가게들이 길 물어보는 사람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여러 호선이 겹치는 환승역이거나 큰 건물이 인근에 있는 역일수록 길을 묻는 사람들은 많다. 문제는 이렇게 사람들이 자주 길을 물어보는 게 가게들의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데 있다.

고속터미널, 시청, 종로 3가, 홍대입구, 서울역 등 환승구간이 복잡하고 유동인구가 많은 5개 역의 가게 9군데를 찾았다. 모든 가게들이 “사람들이 길을 많이 물어본다”고 답했다. 견디다 못해 환승 방향과 주요 건물이 위치한 출구를 정리한 ‘자체 안내도’를 만들어서 붙인 가게들도 있었다. 안내도(사진 ②)를 붙인 시청역내 가게에서 일하는 문소영(22.여)씨는 “10명이 가게를 방문한다고 치면, 반은 길을 물어보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고속터미널역과 시청역내 가게들이 붙여 놓은 자체 안내도. 환승 방향과 주요 건물의 출구가 정리돼 있다.
(왼쪽부터 ①, ②.)

손님 있는데 들어와 길 물어…잘 모른다 대답하면 욕 듣기도

가게 주인과 직원들은 입을 모아 ‘길을 물어보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영업 방해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토로했다. 물건을 사려는 손님을 응대하고 있는 가게 직원에게 길을 물어보기 일쑤고, 그러다 보면 손님들을 놓치기도 한다. 홍대입구역 1호선과 2호선, 경의중앙선 환승구간의 가게에서 일하는 남지영(30.여)씨는 “주문을 받고 있는데 새치기하듯이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기자가 방문한 9개의 가게 중 절반이 넘는 5곳에서,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는 10여 분 동안 사람들은 가게 직원에게 길을 물었다.

그러나 손님이 있다고 건성으로 대답하거나 ‘모른다’고 하면 언어폭력을 당할 때도 있다. 9개의 가게 중 한 곳을 제외한 8곳의 가게들은 길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욕을 들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서울역내 프랜차이즈 가게에서 일하는 익명의 취재원은 “여기서 장사하는 사람이 길도 모르냐며 언성을 높인다”며 “기분 나빠도 넘겨야 한다”고 말했다. 시청역내 환승구간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김우진(41) 씨는 “말 그대로 육두문자를 들을 때도 있다”며 “그럴 땐 황당하다”고 털어놨다.

“노인과 외국인이 주로 물어봐” 안내 부족한 역도 상당수

“어르신이나 외국인이 주로 물어봐요.” ‘어떤 사람들이 길을 물어보는가’ 라는 질문에 나온 가게들의 공통적인 대답이다. 안내판을 알아보기 어려운 60대 이상 고령층과, 한국 지하철이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이 지하철을 이용하는 데 불편을 겪는다는 뜻이다.

왜 고령층과 외국인이 유독 길을 헤맬까. 시청역에서 광화문 교보문고로 가는 길을 몰라 헤매던 시민 김모 씨(62.여)는 “지하철의 안내판이 부족하다”며 불만을 제기했다. “위에 달려 있으니까 한참 찾아야 하고, 글씨가 작아 70, 80대 어르신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 홍콩에서 온 관광객인 응 옌니예(NG YANNIE.46.여) 씨는 “only Korean and English, no Chinese(한국어와 영어만 있고, 중국어는 없다)”라며 한국어와 영어로만 표시된 한국 지하철의 역명을 알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하철 안내 시스템의 문제일까. 이에 대한 가게와 시민의 답변은 모두 “역마다 다르다”였다. 시청역에서는 몇몇 기둥에 출구별로 인근 주요 건물을 정리한 안내가 붙어 있었고, 홍대입구역의 경우 환승 안내판의 역명에 한자 표기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안내가 부족해 보이는 역도 상당수였다. 고속터미널역내 가게(사진 ①)의 ‘자체 안내도’에 표시된 유명 백화점과 건물은 지하철의 안내 게시판에 나오지 않았다. 일부가 개찰구 앞 배너와 벽에 붙은 간이 안내판으로 표시돼 있었지만 일부는 아니었다. 기자가 역 안을 둘러봤지만 어디로 가야 이들 건물에 도착할지 알 수 없었다. 또한 서울역 환승 안내판의 경우 일부는 한자 표기가 있었으나 일부는 한국어와 영어 표기만 되어 있었다.

▲1, 3, 5호선 환승역인 종로 3가 환승구간 사이 가게들이 붙인 자체 안내도.
(왼쪽부터 ③, ④.)

“빨간 옷 입은 어르신에게 물어보세요”

“대한노인회에서 하는, 빨간 옷 입은 어르신들이 계시면 도움이 돼요.” 시청역내 가게의 김 씨가 해결방안으로 언급한 ‘지하철안내도우미’는 서울메트로와 대한노인회 서울시연합회가 연합해 시행하는 노인 일자리 사업이다. 만 65세 이상 노인을 고용해 서비스 태도와 역 주변 지리를 익히는 교육을 거친 후 70여 개 주요 역에 배치해, 길 안내와 질서 유지의 역할을 한다.

이들은 특히 길을 헤매는 고령층과 외국인 관광객의 안내자가 된다. 고속터미널역에서 기자에게 3호선 환승 방향을 물은 안명순(71.여) 씨는 “지하철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빨간 옷을 입고 서 있는 걸 봤다”며 “그런 사람들이 있으면 물어보기 편하다”고 대답했다. 명동과 이태원 등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 역에는 외국어를 구사하는 노인들이 배치된다. 을지로입구 역에서 2년간 지하철도우미로 활동한 이달홍(74) 씨는 “일본인 관광객이 숙소 위치를 물어봐 자세히 알려줬는데, 나중에 역장을 통해 ‘친절히 안내해 줘서 고마웠다’는 편지를 보내온 적도 있다”고 자랑했다. 대한노인회 서울시연합회 강은미 취업지원센터장은 “지하철 업무가 자동화되며 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줄었다”며 “사람들이 물어볼 곳 없이 길을 헤맬 때, 무인화된 지하철의 틈새에 안내도우미가 인간적인 소통으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서비스는 유동인구가 많은 출퇴근 시간에 한정돼 있다. 지하철안내도우미를 언급한 김 씨는 “(이들이)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고 말했다. 또한 대한노인회 서울시연합회가 매년 내는 지하철안내도우미 채용공고에 따르면 2014년까지 500명이던 채용 인원은 2015년부터 300명 대로 줄었다. 강 센터장은 이에 대해 “노인연합회에서 지하철택배서비스 등 다른 사업들을 시작하며 인원이 줄었다”며 점진적으로 다시 늘릴 뜻을 내비쳤다. 작년 말 일본으로 여행을 다녀온 우한솔(24.여) 씨는 “지하철에 노인 역무원들이 곳곳에 상시 배치돼 묻기 편했다”고 말했다.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줬으면”…성숙한 시민의식도 필요

가게에 길을 묻는 이들은, 역무원이 아닌 역내 가게 직원에게 묻기 전에 길을 찾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했는지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도 있다. 고속터미널역내 가게의 허 씨와 인터뷰를 하는 도중 길을 물은 중년 여성은 유명 백화점을 찾는 중이었다. 가게 바로 앞에 서 있는, 사람 키만한 배너에는 백화점의 이름과 함께 ‘20m 직진 후 ↰ ‘가 쓰여 있었다. 허씨는 “안내판, 배너가 있어도 사람들은 안 본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쇼핑몰로 가는 길을 허씨의 옆 가게에 물어본 김모 씨(56.여)는 “평소에도 가게에 길을 자주 물어본다”며 “주위에서 영업하고 있으니 잘 알겠지 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길을 찾는 사람들이 다 물어보면 가게가 힘들 거란 생각을 해 봤나’라는 질문에는 “그냥 일단 찾을 수 없으니까 물어본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가 길을 물어본 가게에서 대여섯 걸음 앞 지하철 안내부스 안에는 역무원이 앉아 있었다.

기자는 취재를 하며 모두 10여 명이 길을 물어보는 것을 봤다. 그 중 답해준 가게 직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사람은 한두 명이었다. 홍대입구역내 가게의 남 씨는 “길을 알려주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간다”고 말했다. 지하철 안에서 장사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가게가 대답해주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손님을 응대하고 있는데 불쑥 들어오고, 모른다고 답하면 일부는 욕을 하는 이유다. 그는 “솔직히 길을 물어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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