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인생을 재주로 살아가려 하지 말라. 문제는 정신이니까.”

언론인 조덕송, 언론에 대한 그만의 신념과 철학은 분명했다. 1971년 발간된 조덕송 著의 『인간관계 110의 법칙』에서, 그는 정신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정신이 제대로 되어 있다면 설령 방법이 서툴더라도 진정성을 이해받을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그는 본인의 삶을 자신이 강조한 그대로 살았다. 그의 삶 내내, 그는 재주보다 정신을 중시하며 살았다.


1. 조덕송의 인생은 그의 저서, 『머나먼 여로』 그 자체였다.

그는 1947년에 기자 생활을 시작하여 1997년에 논설고문을 마지막으로 언론인의 생을 마감하였다. 무려 50년 동안 언론인의 삶을 지냈다. 그 삶의 기간 동안 체포령, 구속, 부역의 고초를 겪기도 했다. 말년에는 ‘시대를 풍미한 명(名)사회부장’으로 불렸다. 그의 인생은 우여곡절 그 자체였다. 그에 대해서 남재희는 ‘청빈-지사형 언론인’, ‘신문기자의 모범’이라고 평가하였으며 조선일보 회장 방우영은 ‘우리 시대의 상처받은 언론인’으로 평가했다. 50년이라는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일을 겪었으면서도, 후대로부터 좋은 평을 받는 인물로 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삶에는 분명 되짚어 볼 만한 점들이 몇 가지 있다.

조덕송은 1926년 2월 1일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1947년, 조선 통신 기자로서 언론인의 명칭을 처음 달았다. 이듬해인 1948년 제주도 4·3 사건 취재 글을 통해 그는 그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1948년 7월호 신천지의 ‘유혈의 제주도’가 바로 그 글이다. 이는 4·3 사건의 진무작전 책임자 박진경 대령 암살범들의 총살형에 관한 내용을 담은 기사이다. 이 기사 때문에 그는 유명세를 얻었지만, 동시에 고초도 겪어야했다. 이 취재를 시작으로 문제가 불거져 조선 통신사가 폐간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이승만 정권 초 서대문 형무소 수감, 구속 중 6·25 발발, 국제 간첩 혐의 연루 등 구속과 석방이라는 평탄치 못한 삶이 이어졌다. 이러한 사건을 연유로 그에게는 빨간 딱지가 붙었다. 이 딱지는 이후 그의 삶 내내 그를 괴롭힌다. 조선일보 회장 방우영이 그를 ‘우리 시대의 상처받은 언론인’으로 평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평탄치 못한 삶이 이어지는 동안, 조선통신사, 국제신문, 해방일보, 자유신문, 조선일보, 전남일보 등 그의 소속도 수시로 바뀌었다. 그러나 순탄치 않은 와중에도 그는 그 나름의 신념과 철학인 ‘정신’을 지켜냈다.

< 언론인 조덕송의 약력 >

 

 

 

 

 

 

 

 

 

 

 

 

2. 정확한 기사를 쓰는 청렴한 언론인, 조덕송

언론인 조덕송, 그가 강조했던 정신, 즉 그만의 신념과 철학은 분명했다. 그의 삶에는 주목할 ‘정신’ 2가지가 녹아있다. 첫째는 기사의 정확성 그리고 둘째는 청빈한 마음가짐에 대한 것이다.

첫 번째, 기사의 정확성에 대한 그의 생각은 1963년 신사조에 쓴 ‘오보의 가능성과 그 주변’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신문(보도)의 책임이 “대중에게 일(사건)을 전달함에 있어 최대한도의 사실진상을 제공함으로써 대중으로 하여금 사물을 판단하는 데 오도되거나 편견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라 말했다. 기사의 사실성과 정확성을 중시하는 발언이다. 이 와중에 그는 자유 경제체제에서 경쟁이 미치는 영향 또한 무시하지 않았다. 신문이 오보 가능성을 가지는 이유는 경쟁에서 앞서려고 하기 때문에 때로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고 그는 판단했다. 하지만 오보를 범했을 때에는 도의적, 법적으로 성의 있게 기사를 정정 또는 해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독자로부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방도로써 말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의 언론에도 틀림없이 해당되는 말이다. 나아가 그는 기사를 작성할 때에는 현장과 사실 확인을 통해 객관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1996년에 그는, ‘픽션 같은 기사가 너무 흔하다’고 당시의 언론 현실을 비판하였다. 이후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똑같은 비판을 언론이 받고 있다는 점은 반성해 마땅하다.

두 번째, 그는 항상 청빈한 생활을 유지했다. 1970년대 후반, 언론인으로 생활한 지 30년이 다 되어서야 그는 서울 답십리에 열 평짜리 집을 마련하였다. 남재희와 있었던 일화에서도 그의 청빈함은 드러난다. 신문사 간부 생활을 할 때, 고관의 초청으로 좋은 요정에 왕왕 파티를 갈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파티 참석 후에 그는 이내 허름한 대포집에서 소주나 막걸리를 마셨다. 그러면서 그는 “아이고 이제 술을 마시는 것 같군.”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소탈하고 검소한 그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는 일화이다. 최근 이른바 김영란 법으로 인하여 온 사회가 시끄러웠다. ‘언론인의 직업적 윤리를 법적인 규제 안에 넣어야 하는가?’가 핵심 화두였다. 조덕송, 그의 삶이 보여주는 청렴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시점이라 생각된다.


3. 정신을 강조했지만, 재주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 기자로서의 전문성: 글재주, 해박한 지식, 예리한 시선

조덕송과 함께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에서 근무했던 남재희는 본인의 회고록 『文酒 40년』에서 조덕송을 ‘되글을 배워 말글로 쓰는 사람’으로 평가했다. 조덕송은 일세를 풍미한 명 사회부장으로 불릴 정도의 글 솜씨를 지녔었다. 고졸의 학력이 다였지만, 대졸 못지않았다. 제주도 4·3 사건 취재 글인 ‘유혈의 제주도’를 통해 처음 세상으로부터 글 솜씨를 인정받았다. 《신천지》 48년 7월호에 실렸던 바로 그 취재 르포 도입부만으로도 그의 필력을 엿볼 수 있다.

--오후 8시가 제주도의 서울, 제주읍의 통행금지 시간이다. 해가 짧은 남녘의 여름이라 할지라도 오후 8시면 아직 황혼의 안개가 어둠을 기다리는 산책의 시간이련만, 이곳 제주의 거리는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진다. 동란을 모르고 예와 같이 우는 애상적인 물새 소리가 처량하다가 점점 어둠의 치수가 깊어가면 이상한 흥분 가운데 살기가 창일하여 가고 제주의 밤은 완전히 죽음의 장막에 뒤덮여 버린다.

이어 백범 김구 장례식 기사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기도 했다. 그 기사를 직접 확인할 수는 없으나, 다음 인용을 통해 백범의 법정 출두에 대한 단독 취재 내용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조덕송 본인의 취재를 바탕으로 98년에 인터뷰에서 재 서술한 내용이다.

“내가 그 때 젊은 나이로 감탄한 것은 김구 선생의 바윗돌 같은 몸가짐이었어요. 까만 두루마기에, 깜장 고무신에, 깜장 중절모를 쓰고 나오셨는데, 모자를 벗고 들어와서는 강거복씨(변호사)가 안내를 하니까 자리에 앉더니만……. 증인석이란 게 바로 방청석 앞에 있었어요. 검찰 심문이 시작돼서 (검찰관이) ‘직업이 뭐냐?’고 물었어요. (김구 선생이 특별한 직업이 있는 분도 아니고 해서)나는 조금은 주저도 하고 그럴 줄 알았단 말이요, 그런데 천연스럽게 조건반사적으로 나오는데…….”
- 뭐라구요?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요’ 이러더라구. 그런데 그게 어떻게 그렇게 (그 자리에선)자연스럽게 들리던지……. 거 참 그 때 감격스럽더구만.”
- 예.
“독립운동이란 게 직업이 될 수 있느냐, 그런데 그게 김구 선생이 말하니까 딱 들어 맞는거야. 참 명답이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기사)제목도 그렇게 뽑자고 (내가 주장)해서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다’ 그렇게 (제목을)뽑기도 했는데……. ”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서술한 인터뷰 내용이지만, 여전히 현장의 묘사가 생생하다. 이를 통해 그가 뛰어난 이야기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가늠해볼 수 있다. 덕분에 그는 ‘신문기자들의 모범’이 될 만한 글재주 또한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조덕송은 글재주도 좋았지만, 해박한 지식 또한 갖추고 있었다. 그가 쓴 기사에는 그의 넓고 깊은 지식이 드러난다. 그가 이러한 지식을 갖추게 된 데에는 그의 스승인 홍종인 선생의 영향이 컸다. 그에게 홍종인 선생은 기자로서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영원한 현역기자』에서 조덕송은 ‘기자는 변하는 세상 앞질러가야’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홍종인 선생과의 일화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홍종인은 술을 많이 하는 조덕송에게 “신문기자가 필요에 따라 술자리를 하고 기염을 토해보는 것도 좋지. 하지만 그것을 일과로 삼으면 공부를 못하게 돼. 세상은 날로 변해 가는 데 신문 기자는 변하는 세상을 앞질러 가야 하는 게야. 그래야 사회를 이끌어가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터이니까…….”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이에 조덕송은 잊지 않고 이 교훈과 충고 말씀을 되씹어 볼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 가르침이 있었기에 그는 더욱 성실히 지식을 갖추어 나갈 수 있었다. 박학다식했던 그였기에, 그는 남북한 통일, 교육, 종교 등의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언론계에 대하여, 위에서 언급했던 픽션 같은 기사에 대한 지적도 깊은 지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해방일보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기사에 대해서 ‘혁명노선에 따라 있어야 할 사실로 고양하여 형상화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서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그의 예리한 시선과 지식의 깊이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신문사나 현상,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4. 따라 다니는 붉은 딱지. 우리 시대의 상처 받은 언론인, 조덕송

조선통신사 폐간을 이끈 그의 글과 그로 인해 내려진 체포 명령은 그의 언론생활 내내 따라다녔다. 이른바 ‘붉은 딱지’가 붙은 것이다. 좌익적 성향에 대한 낙인은 지워질 줄을 몰랐다. 후에 해박한 지식과 언론인으로서의 모범적인 모습을 인정받아 남북적십자회담에 자문위원으로 북한에 다녀오기까지 긴 시간동안 조덕송은 그늘진 언론 생활을 감내해야만 했다.

조덕송,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관통해 지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 이후 이데올로기적 대립, 6·25 전쟁, 4·19 민주화운동, 5·16 군사 쿠테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6·10 민주 항쟁까지 모두 지켜본 장본인이 조덕송 그이다. 그는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언론인으로서, 많은 것을 지켜보고 그 사실들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하나의 예로, 반민특위 취재를 하여 당시의 분위기를 상세하게 증언하기도 했다. 전남일보 논설고문 때에는 ‘민족 대드라마의 증언’이라는 글을 통해 역사적 인물을 재조명하기도 했다.

1989년 출판사 다다에서 출판한 조덕송의 저서 『머나먼 여로』가 있다.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머나먼 여로’ 그 자체였다. 쉬운 삶을 산 언론인은 아니었다. 많은 일을 보고 듣고 겪으면서도 그는 ‘언론인의 모범’으로 남았다. 그의 삶을 기억하며 그가 남긴 교훈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 기사의 사실성 부여를 위한 노력과 오보 정정 기사를 통한 신뢰 회복의 중시, 청빈한 삶 등 그에게서 본받을 만한 점들이 여럿 존재한다. 특히나 현재의 언론인들에게는 그 의미가 더욱 크게 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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