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대통령은 오사마 빈라덴에게는 덤벼도 나에게는 덤비지 못한다.”
2006년 1월 27일 미국 대통령 기자회견 직후 85세의 레바논계 여기자가 한 말이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손을 든 기자들 중 한 사람을 제외한 모두에게 질문할 기회를 줬다. 유일하게 질문하지 못한 이 기자의 이름은 헬렌 토머스였다. 기자석 맨 앞줄 가운데에 앉아 줄곧 손을 들었던 ‘언론계의 퍼스트레이디’는 끝내 질문권을 얻지 못했다. 미국 인터넷 매체 <드러지 리포트>는 토머스가 기자회견 직후 부시 대통령을 향해 “대통령은 겁쟁이”라고 말했다고 같은 날 보도했다.

백악관 대통령 기자회견은 토머스의 질문으로 시작해 그녀의 “감사합니다, 대통령(Thank you, Mr. President)”이라는 인사말로 끝을 맺는 관례가 있었다. 60년의 기자 경력 중 50년을 백악관에서 보낸 최고령 기자에 대한 일종의 존경 표시였다. 그런데 2003년 부시가 이 관례를 깼다. 첫 질문을 토머스가 아닌 다른 기자에게 받고 기자회견을 끝낼 때에도 “땡큐(Thank you)”라 말하며 선수 쳤다. 토머스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부시정부의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반 이슬람주의에 그녀가 날선 비판을 가했기 때문이다.

약 2달 뒤, 드디어 기회가 왔다. 2006년 3월 21일에 있었던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첫 질문자로 토머스를 지목했다. 3년 만이었다. “후회할 텐데요.” 주름살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에 심술궂은 미소가 번졌다. 토머스는 이내 정색하며 부시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부가 밝힌 이라크 전쟁의 원인은 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당신이 전쟁을 일으킨 진짜 이유가 뭡니까? 석유입니까? 이스라엘입니까?” 그녀는 그렇게 또 한 명의 미국 대통령을 피고석에 세웠다. 이 장면은 NBC등을 통해 미국 전역으로 생중계됐다.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Youtube)를 통해 ‘Helen Thomas’를 검색하면 부시 대통령과의 당시 기자회견 영상을 볼 수 있다.

다음 날부터 토머스가 일하는 허스트신문그룹의 사무실에 갖가지 색깔의 장미가 배달되기 시작했다. 토머스의 용기에 감탄한 미국 시민들이 보낸 것이었다. 워싱턴 의회 전문지 <더 힐>은 2006년 4월 1일 “넓은 회의실이 미국 전역에서 배달된 1300여 송이의 장미꽃으로 넘쳐날 정도다”라고 보도했다.
헬렌 토머스는 1920년 8월 4일 켄터키 윈체스터의 레바논 이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디트로이트 이스턴 고등학교 재학 시절, 학교 신문 기자로 활동하며 기자의 꿈을 키웠다. 그녀는 학업보다 기사쓰기에 열중했다. 웨인주립대학 졸업 후인 1943년 미국의 통신사인 UPI(United Press International)에 취직하며 기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60년 기자생활의 출발이었다. 그 중 50년을 백악관에서 보냈다.

토머스가 기자생활을 시작한 1940년대 미국은 기자를 남성의 직업으로 여겼다. 1908년 만들어진 ‘전국언론인클럽(National Press Club)’에 첫 여성 회원이 생기기까지 48년이 걸릴 정도였다. 1956년 처음으로 여성회원을 받았지만 이마저도 이들의 참석을 오찬자리에만 한정한다는 조건에서였다.

백악관 최초의 여기자인 헬렌 토머스는 미국 내 여기자 차별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1959년부터 이듬해까지 ‘전국여성언론인클럽’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1974년에는 백악관 여기자로서는 최초로 간사로 선출됐다. 같은 해 11월에는 미국 중견 언론인 모임인 그리다이언 클럽(Gridiron Club)의 최초 여성 회원으로 선정됐다. 오직 남성만을 회원으로 받아들이던 그리다이언 클럽의 89년 전통이 헬렌 토머스의 ‘최초’ 수식어와 함께 깨지는 순간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토머스의 사망 당시 발표한 성명에서 “토머스 기자는 여성 언론인의 벽을 허문 진정한 개척자”라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즈> 역시 “토머스의 날카로운 호기심과 지칠 줄 모르는 투지는 남성위주의 백악관 기자단에서도 그를 선구적 기자로 만들었다”고 2013년 7월 21일 부고기사를 통해 보도했다.

토머스는 1961년부터 2010년까지 백악관 출입기자로 활동했다. 백악관 출입 기자단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 됐다. 클린턴 재임 당시 제작된 백악관 홍보 영상에 출연해 클린턴에게 “아직도 거기 있어요?(Are you still there?, 당시 르윈스키 스캔들로 탄핵위기를 맞았던 클린턴에게 아직도 대통령을 하고 있냐는 의미로 타박한 것)”이라고 너스레를 떤 노령의 여기자가 바로 헬렌 토머스다. 50년 간 직접 취재한 미국 대통령은 그녀와 같은 해 백악관에 입성한 케네디부터 오늘날 백악관의 주인인 오바마까지 총 10명에 이른다.

어느 기자보다 백악관에서 오래 일한 헬렌 토머스는 역대 대통령들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그녀는 자서전인 <백악관의 맨 앞줄에서>에서 “케네디는 올바른 메시지 전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토머스는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으로 케네디를 꼽기도 했다. 닉슨에 대해서는 “언론에 대한 증오심과 반감으로 가득했던 대통령이었다”고 회고했다. 레이건은 “‘위대한 의사 전달자’라고 불릴 만큼 언변이 좋았고 언론에 우호적이었지만 뭔가 냉담하고 꾸며진 듯한 분위기가 배어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녀는 자서전을 통해 1992년 미국 대선 당시에는 아버지 부시의 사임을 예상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텍사스에서 선거 결과를 지켜보던 아버지 부시가 결과발표가 나기도 전에 낚싯줄, 컨트리 가수의 CD등을 쇼핑하는 모습을 보고서다.

헬렌 토머스가 ‘언론의 퍼스트레이디’로 불린 이유는 긴 경력만이 아니다. 기자로서의 투철한 사명감도 한 몫 했다. 그녀는 특히 대통령 기자회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토머스는 자서전에서 “미디어는 때때로 무소불위의 대통령 권력을 억제하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대통령 기자회견은 대통령을 피고석 혹은 증인석에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미국 대통령들은 그녀의 날카로운 질문에 곤혹스러워 했다. 앞에서 소개한 아들 부시와의 설전은 일부에 불과하다. 토머스는 1974년 닉슨에게 “당신이 정말 워터게이트에 연루되었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클린턴은 1998년 4월 25일 백악관 출입기자 클럽 만찬에서 “헬렌 토머스가 백악관 최장수 기자라서 영예로운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녀는 두려움 없는 온전함으로 일관성 있게 정부를 견제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오바마 역시 2013년 7월 20일 토머스의 부고 소식을 듣고 발표한 성명에서 그녀를 “정치 지도자들의 책임을 추궁하는 냉정한 질문을 통해 민주주의가 가장 잘 구현될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가진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토머스 기자는 오랜 기자생활을 통해 많은 미국 대통령들을 긴장하도록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녀의 사명감은 이웃나라에서도 유명했다. 미국과 쿠바의 민주주의가 갖는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49년간 쿠바를 통치한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헬렌 토머스의 질문에 반드시 답변하지 않아도 된다.” “기자들이 질문하지 않으면 대통령은 왕이 될 수도 있다.” 헬렌 토머스가 마지막으로 쓴 칼럼에서 한 말이다. 헬렌 토머스는 기자회견을 통해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를 ‘피고석’ 혹은 ‘증인석’에 앉힐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를 기자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5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남자 10명을 취재하면서 이러한 생각을 실천으로 옮겼다. 2013년 사망한 이 미국의 여기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올 해 1월 12일, 청와대에서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이 있었다. 현 정권이 들어선지 3년이 지났지만 대통령 기자회견은 단 두 차례에 불과했다. 질의응답 당시 “청와대 출입을 하면서 내용을 전혀 모르시네요”라며 박근혜 대통령이 기자에게 면박 아닌 면박을 주는 장면이 방송을 타기도 했다. 그날, 박근혜 대통령은 왕이었을까? 피고인이었을까? 2013년 세상을 떠난 헬렌 토머스는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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