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 4m 골목길이 어지럽게 이어져 있고 좁은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쪽방촌. 이곳에 불이 났다. 다행히 근처에 소방서가 있어 금방 출동할 수 있지만 길이 9m, 폭 2.5m인 소방차가 불이 난 곳까지 들어올 수는 없다. 이럴 때 주민들은 소방대원이 도착할 때까지 두 손 놓고 구경만 해야 하는 것일까? ‘비상소화장치’(이하 ‘소화장치’)는 바로 이런 다세대주택 밀집지역, 고지대, 상가지역 같이 소방차가 들어오기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한 지역에 있다. 소화장치함 안에는 소화기와 소방 호스, 파이프, 드라이버 같은 공구들이 있다. 소방대원이 오기 전에 주민들이 화재 초기 진압용으로 쓰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 소화장치는 서울지역 소방취약 2천여 곳, 전국 7천여 곳에 있다.

“소방대원이 쓰는 거 아니야?”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에 사는 김봉순(75, 여) 씨는 소화장치에 대해 묻자 이렇게 되물었다. 김 씨네 옆 주택에 12년째 살고 있는 김혜영(53, 여) 씨도 “(소화장치 사용법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 해 이사 온 한예나(22, 여) 씨는 “(소화장치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 동네 소화장치는 한 씨의 집 대문 바로 옆에 있다. 서울 서빙고로 71길에 있는 소화장치를 중심으로 반경 10m 이내에 사는 다섯 집 모두 소화장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다양한 음식점과 숙박집이 모여 있는 이태원에도 소화장치가 있다. 이곳에서 요트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김병욱(59, 남) 씨는 소화장치가 어디에 있냐고 묻자 게스트하우스 주변을 한참 헤맸다. 소화장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열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있었다. 찾는 데는 2분이 걸렸다. 김 씨에게 소화장치 사용법을 보여달라고 하니 흔쾌히 팔을 걷어붙였다. 이내 소화장치가 비밀번호식 자물쇠로 잠겨있는 것을 보고 “번호를 몰라서 못 열겠다”고 말했다. 김 씨는 비상소화장치함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비밀번호 0119가 적힌 스티커를 발견했다. 문을 여는 데 걸린 시간은 3분. 비밀번호 자물쇠가 익숙하지 않아 자물쇠를 이리 저리 돌리고 잡아 당겼다.

김 씨는 해군에서 비상 소방훈련을 받았고, 인명구조 교육 이수증도 있다고 했다. 소화장치함 문을 연 김 씨는 소화기와 호스를 만지작거렸다. 소방 호스의 길이가 몇 m나 될지 가늠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소화전과 호스를 연결해 물을 뿌리는 과정을 모두 파악하는 데까지 5분이 걸렸다. 김 씨는 소화장치함 문을 닫으며 말했다. “나 같은 사람도 이정도 걸리는데..” 이 모습을 보던 동네 주민 서금만(71, 남) 씨는 흥분한 목소리로 “1년 전쯤에 근처에서 불이 났는데 소방차가 빨리 못 들어와서 옆집으로 번졌다. 이런 거 알았으면 불이 크게 번지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했다. 김 씨는 기자에게 “덕분에 좋은 거 알았다”고 말했다. 용산구에는 소화장치 135개가 소방차 통행 곤란지역과 불통지역에 있다.

용산구는 그래도 나은 경우다. 소화장치 자물쇠 비밀번호가 장치함에 적혀있어서 불이 났을 때 누구나 소화장치를 열 수 있다. 중구 신당동의 한 소화장치(동호로 11라길 1)는 열쇠식 자물쇠로 잠겨있다. 키가 있어야만 소화 장치를 쓸 수 있다. 중부소방서 일제조사 자료에는 키를 인근주민 3명이 갖고 있다고 나와 있다.

주민들은 열쇠를 누가 갖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소화장치와 가까이 있는 다세대주택 4가구에 물었지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근 주민 16명도 모두 모른다고 답했다. 신당동 14통장 전미현(56, 여) 씨는 “소방서에서 알려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전 씨는 15년 넘게 이 동네에 살고 있다. 소화장치의 자물쇠는 녹슨 상태였고 소화도구 사용법이 적힌 안내 문구는 벗겨 있었다.

지난해 5월 박원순 서울 시장은 서대문구 영천시장을 방문해 소화장치를 점검했다. 지난 달 6일부터 24일까지 서빙고로에서도 주민들을 대상으로 소화장치 훈련을 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소방서에서는 마을을 찾아가 소화장치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주민들이 실제로 사용해보는 방식으로 소화장치 사용 교육을 한다. 주민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신당동 15통장 강영희(56, 여) 씨는 “통장들을 모아서 교육을 때때로 하지만 형식적으로 이뤄지는 느낌이다. 전문적인 분들이나 할 수 있을 듯하고 우리가 얼마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중구 장충동에 사는 김성근(49, 남) 씨도 실질적인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 씨는 “소화장치를 설치하러 온 사람들이 사진만 찍고 갔다. 사용법은 안 알려주더라”고 말했다. 이어 “고지대라 소방차가 올라오기 어렵고 소화기 있는 집도 많지 않다. 수시로 교육해야 하는데 지금은 소화장치가 있어도 소용이 없다”고 덧붙였다.

용산구 서빙고 119안전센터 정재호 소방장은 주민들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 소방장은 “1년에 2번씩 사용법 교육을 하고 있고 방송을 통해 안내하지만 관심을 보이는 주민이 많지 않다”면서 “강제할 수 없다보니 한 번 교육할 때 5명 내외의 주민만 보러 온다”고 말했다. 이어 “소화장치는 큰불로 번지는 걸 막는 초기진압 5분에 매우 중요한 만큼 많은 주민이 교육에 관심을 보였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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