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동대문운동장 건물지 발굴전경이다. 이간수문과 서울성곽을 비롯해 성곽 주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구, 유물이 대거 발견됐다. [출처] 동대문역사문화공원 건설사업 기록지

동대문운동장 밑에는 옛 시간이 그대로 쌓여있었다. 2008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공사에 앞서 운동장을 철거하니 조선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발굴된 유적은 600년 고도 서울의 저력을 보여줬다.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서울성곽의 기저부를 비롯해, 문헌으로만 남았던 치성(적을 진압하기 위해 성곽 일부를 네모나게 돌출시킨 것)도 최초로 확인됐다. 도성 안쪽의 물을 빼내던 이간수문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 부분만 빼면 온전했다. 성곽 내부에서는 조선시대 하도감, 군수공방, 병사숙소를 포함한 건물지 10곳 이상, 집수시설 2곳, 우물 4곳도 나왔다.

 

발굴을 맡았던 차용걸 전 중원문화재연구원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건물지 유구(인간의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의 범위가 넓게 분포했다. 북편으로 이어지는 유구는 도로로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 양상을 조사하다보니, 물이 고여 연못을 만든 것도 나왔다. 발굴조사가 완료되는 단계에서 발굴단의 가장 큰 고민은 많은 유물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였다.”

 

시간에 쫓기던 서울시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이미 2007년 12월 13일 야구장 철거, 2008년 3월까지 계획 설계, 2008년 6월까지 기본 설계를 완료한다는 계획을 수립해 놓은 상태였다. 2007년 말 문화재 발굴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시굴조사에 나선 이유다.

 

발굴조사단 섭외도 어려웠다. 추운 겨울날씨에 발굴하기를 꺼리는 업체가 많았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동절기 발굴조사 금지규정은 따로 없어 발굴은 허락했지만, 조사일수와 트렌치(건조물에 배선, 배관 또는 컨베이어 벨트 등을 설비할 경우에 바닥을 파서 만드는 도랑)를 줄이도록 제안했다. DDP 사업을 서울시의 예정대로 마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서울시가 동절기 발굴을 강행한 이유다. DDP 백서에도 ‘충주에 있는 중원문화재연구원에 직접 내려가 거듭 부탁한 끝에 겨우 허락을 얻어낼 수 있었다’고 적혀있다. 중원문화재연구원은 3교대로 밤에도 발굴을 했다. 그만큼 급했다.

 

2008년 6월 20일, 발굴지도위원회-자문위원: 김동현(건축사), 윤홍로(건축사), 개별자문: 김홍식(건축사), 안창모(건축사)-가 열렸다. 자문위원의 의견은 강경했다. ‘하도감터 현 위치에서 보존하는 것이 최상책이다. 서울시 안처럼 현 위치보다 레벨을 낮춰 이전 보존하는 사례는 없다. 건물 이전 복원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차선책으로 잘 남은 부분(3×5칸)을 선정해 서울성곽 안쪽에 이전보존하고, 건물 내 썬큰(지하에 자연광을 유도하기 위해 대지를 파내고 조성한 곳) 바닥에 유구발굴구역을 표시해두고 설명판을 설치하는 등 여러 보존방안에 대한 연구를 잘하여 합리적인 방법으로 처리하도록 한다. 서울성곽 서울시 안처럼 설계상 공원 레벨에서의 성곽 복원은 의미가 없다. 현재 발견된 유구 레벨에서 보존하는 방안을 검토하되, 일본의 오사카성, 중국의 뇌봉탑,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 사례를 참고하여 보존 방안을 마련하도록 한다.’ 오사카성, 뇌봉탑, 루브르박물관은 모두 유적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개발을 진행한 모범 사례다. 지하에 남겨진 유적은 유리바닥을 통해 관광객에게 그대로 공개되고, 그 위에 새로운 건물을 지은 형태다.

 

한 달 뒤 7월 21일, 발굴지도위원회-지도위원: 김동현(건축사), 윤홍로(건축사), 조유전(고고학), 김홍식(건축사), 이강승(고고학), 김봉건(건축사), 백종오(고고학), 개별자문: 최병현(고고학), 나선화(도자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하도감 유구는 중요한 문화재이니 영국 설계자와 협의하여 현위치에 보존하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두 달 뒤인 9월 11일, 발굴지도위원회-지도위원: 김동현(건축사), 윤홍로(건축사), 김봉건(건축사), 나선화(도자사), 손영식(건축사), 정재훈(조경), 개별자문: 지건길(고고학), 최병현(고고학), 이강승(고고학), 백종오(고고학), 조유전(고고학)-는 한 발 물러선다. ‘하도감 터 전부를 보존할 필요는 없으므로 완전한 일부만 부분 보존한다. 기와보도는 경화시켜 해체 보존을 검토한다. 서울성곽 유리보호막 씌우는 것은 반대한다.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이 좋다. 서울성곽 보존 빛 복원은 발굴 완료 후 다시 논의하도록 한다.’

 

9월 23일엔 서울시와 문화재청 관계자들이 모였다. 회의록에 따르면 발굴조사과 이은석 학예관은 “설계자 설득도 어려운 문제라고 본다. 현상보존조치가 되면 문화재청(문화재위원) 때문에 사업 못하다는 비난이 일 것이다”는 우려를 나타내며 “성곽내측 건물지는 특별한 것이 없어 공원 안으로 옮겨도 될 것이다”는 의견을 냈다. 시울시 DDP 담당관 역시 “현상보존조치는 사업포기로 귀결될 것”이라며 “설계안은 국제현상공모로 이루어져 설계변경 및 포기는 국제적인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틀 뒤인 25일엔 문화재청 차장이 발굴현장을 방문해 설계변경이 가능한 지를 묻지만 설계를 변경해도 기본틀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응답을 들었다. DDP가 그 터에 세워지는 한, 중요 유구를 보존하는 길은 이전보존 밖에 없었다.

 

10월 6일 열린 발굴지도위원회-지도위원: 박강철(건축사), 이강승(고고학), 나선화(고고학), 김동현(건축사), 김홍식(건축사), 김동욱(건축사)-의 회의안건은 하도감 터 하부층 발굴조사를 위한 상층 건물지 이전보존 대상 선정이었다. 여러 층에 걸쳐 나타난 유구 중 옮겨서 보존할 것을 취사선택하겠다는 의미다.

 

2009년 2월 20일, 지도위원인 김동현 건축사는 개별자문회의에서 축구장 부지에서 나온 유구 중 연대가 분명하고 규모 및 잔존상태가 양호한 유구는 이전대상지 지하에 매장보존하자는 의견을 내놨다. 다음날인 21일, 이남규 고고학자 역시 개별자문회의에서 발굴 조사된 제철유구는 전형적인 정련,단조유구로 보기 어렵다며 이전 필요성이 전무하다고 조언했다.

 

그해 4월, 발굴지도위원회는 건축전문가의 자문을 바탕으로 이전대상 유구를 결정했다. 그렇게 일부 유구는 썬큰하부로, 일부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옮기기로 했다. 4월 10일 문화재청장이 발굴현장을 방문해 서울시의 유구이전계획안에 동의하면서 지난한 유구논란은 종결된다.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은 “서울성곽 및 문화재를 주제로 조성된 새로운 명소 탄생을 예감한다”고 말했다.

 

2009년 6월, 서울시는 유구와 유적을 DDP 옆으로 옮겨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공원이 문을 연 건 불과 4개월 뒤였다. 오 전 시장은 당시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을 열며’라는 게시물을 자신의 블로그에 남겼다.

 

‘하도감터와 유구(인간의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 어디에서 튀어나왔나, 싶은 분들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조선 전기부터 구한말 시대까지의 생활상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이 흔적들은 일제가 당시의 경성운동장, 즉 동대문 운동장을 지으면서 땅 속에 묻어버린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동대문 운동장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새롭게 발견 되었습니다.’

 

▲ 발굴 당시 하도감 터(좌, 출처= 중원문화재연구원)/ 복원된 하도감 터(우, 출처= 오세훈 전 서울시장블로그) 복원된 하도감 터

그의 말처럼, 동대문운동장 밑에는 분명 ‘조선시대 생활사를 보여주는 유적’이 숨 쉬고 있었다. 중원 문화재연구원이 발굴 중 찍은 사진(왼쪽)에는 긴 세월 쌓인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담겨있다. 현재 역사박물관 앞뜰에 복원된 유적의 모습(오른쪽)과는 사뭇 다르다. 전문가들은 서울시의 이런 복원을 어떻게 평가할까?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 소장은 “이건 발견된 유적을 부분 부분 뜯어 하나로 모아놓은 잡화점에 불과하다. ‘하도감 터’에서 터를 옮겼다는 것은 복원을 한들 유구를 아무 의미도 없게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집과 마당 터가 있으면, 이걸 그대로 놔두면 이게 뭔지 안다. 그런데 일부만 잘라서 모아놨다고 생각해봐라. 알 수가 있나?” 그가 덧붙였다.

 

홍익대 건축학과 조한 교수도 “장소성이 핵심인 유구를 옮기는 건 형태, 즉 공간성은 보존하지만 장소가 가진 시간성을 잃게 한다. 우리가 인사동, 서촌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곳이 멋있기보단 사람의 시간이 쌓여있기 때문이지 않느냐”며 “때로는 발굴된 그 자체가 더 큰 울림을 준다. 동대문 역사박물관은 그런 면에서 박제된 전시”라고 말했다.

 

옮겨놓은 유구의 궁색함이 불편한 건 전문가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한겨레 윤형중 기자는 ‘유구라는 단어의 설명이 없었고, 언뜻 보면 잔디밭 안에 네모난 흙판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고 르포기사에 적었다. 이렇게 하도감 터가 가진 의미를 스스로 퇴색시킨 서울시. 그래놓고는 ‘스토리텔링을 통한 서울 관광 명소화 프로젝트’라며 <하도감 이생전>이라는 창작 이야기 극도 만들었다. 한쪽에선 문화재를 아낀다면서 다른 한쪽에선 그 의미를 훼손시킨 일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서울시는 2012년 4월 서울성곽을 UNESCO 세계문화유산에 잠정 등재하기로 결정했다. 서울성곽은 성벽뿐 아니라 성문, 옹성·치성·곡성·봉수대, 수문으로 구성된다. DDP 건설현장에서 발견된 치성과 이간수문 모두 성곽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란 얘기다. 수문과 성곽을 복원하는 동시에 바로 옆에 대형 건축물을 지은 주체는 서울시다. 서울시는 한편에서 성곽의 가치를 떨어뜨리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외치는 모순을 보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려면 ‘탁월한 보편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서울성곽의 보편가치는 이미 전문가들도 인정했다. 세계 그 어떤 도시에도 이렇게 600년 역사를 간직한 거대한 성곽은 없기 때문이다.

 

유네스코는 이 외에도 세계문화유산에 3가지 기본사항을 요구한다. 재질과 기법에서 원래 가치를 보유하는 진정성, 유산의 가치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충분한 제반 요소를 보유하는 완전성, 법적, 행정적 보호제도 같은 보호 및 관리체계가 그것이다. 서울시가 이간수문, 성곽, 치성을 각 시대별에 맞는 기법으로 복원한 것은 진정성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 한양도성도(좌)/ 한양도성 현재모습(우, 구글어스 2014년 5월 4일 검색 기준)

하지만 완전성과 보호 및 관리체계 측면에서, 서울 성곽은 허점이 많다. 성벽 인근에서 발견된 하도감 터를 비롯한 유구는 성벽을 지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성벽과 비교해도 그 가치가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복원된 형태를 보면, 군인들이 성 밖에서 훈련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된다. 더욱이 유네스코는 유산의 보호에 악영향을 끼치는 개발의 피해의 정도도 세계문화유산 선정에 고려한다. 이미 지어진 DDP를 포함해 서울성곽 인근에는 개발 사업이 한창이다. 성곽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이 공염불이 될까 우려하는 이유다.

 

 

▲ 성곽주변 행정구역별 개발현황(출처= 서울성곽 총정비, 종합정비 기본계획)

앞으로도 개발과 보존의 문제는 계속될 것이다. DDP 건설 당시 이 문제에 직접 맞닥뜨렸던 차용걸 전 중원문화재연구원장에게 바람직한 해법을 물었다. “당시 이른바 혁신과 규제완화정책이 계속되면서 문화재 보호와 보존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해결책으로 나온 게 ‘개발과 보존의 조화’란 명문이었다. 하지만 개발과 보존은 양립이 어렵다. 개발과 보존이 충돌하는 현상은 비단 우리뿐이 아닌데, 우린 아직 여러 선진국의 모범 사례들을 수용할 수 있는 터전이 갖추어지지 못한 듯하다. 모든 토지 소유자가 납득할 수 있는 문화재조사 관련 보상원칙을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


오 전 시장의 DDP, 이명박 전 시장의 청계천. 두 전 시장의 역점사업은 각각 새로운 랜드마크 건설이라는 공과 함께 유적을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렇듯 유적을 뒤덮는 개발이 반복되는 이유를 조한 교수는 이렇게 분석했다. “지자체장 임기 내에 무언가 하겠다는 태도가 가장 큰 문제다. 일본, 유럽만 살펴봐도 이런 대형 프로젝트에서 유물이 발견되면 의견 수렴기간이 10년 이상 걸린다. 물론 그 지자체장이 순수한 의도로 추진할지라도 장소의 역사성을 보존하려면 그 계획에도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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