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권상 전 KBS 사장

 

“구속이 임박했으니, 몸을 피했으면 좋겠다”, 은밀히 전달된 메시지

 

1980년 7월 초 아침이었다. 박권상 동아일보 당시 편집인 겸 논설주간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김상만 동아일보 사장이었다. 같이 점심먹자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달랐다. 박권상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 사장은 그에게 선약이 있더라도 취소하고 꼭 나오라고 했다. 둘은 미 8군 골프클럽 식당에서 만났다. 대화도중 김 사장은 박권상과 대화하던 중 목소리 톤을 낮춰 영어로 말했다. “당신에 대한 구속이 임박했으니, 몸을 피했으면 좋겠다.” 한국인 종업원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박권상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그는 두 달 전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국내에 있었다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박권상은 당시 정부가 선정한 제거대상에도 올라와 있었다. 신군부는 ‘정화언론인 취업허용건의’라는 문건을 만들었다. 1980년 7월 1일 이후 정부가 지정한 정화대상자들은 취업에 제한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사실상 언론인으로 활동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전체 정화대상자 711명 언론인 가운데 A급은 12명이었다. 이들은 ‘영구제한’한다고 분류했다. 여기에 박권상이 포함됐다. 본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80년도 전두환 대통령의 계엄통치시절에, 언론은 매일 사전 검열을 받았다. 현 정부에 반하는 글을 쓰면 전문이 삭제됐다. 그 해에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1960~1980년대는 군사정부가 정권을 유지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시기였다. 언론은 정부와 한 편이 되길 강요받았다. 반대하는 기자는 현 국가정보원인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서 맞거나 협박을 받았다. 억지로 죄명을 씌워 기자 자격을 박탈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박권상은 언론의 정도(正道)를 걸었다.

 

국민의 시선을 “호랑이”로 여기고 당당한 글 싣고자 사장에게 쓴 소리까지

 

언론이 억압받던 20여년은 박권상이 동아일보에 재직한 시절과 맞물린다. 그는 1962년 5월 한국일보에서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넘어와 1980년까지 다녔다. 당시 동아일보는 외압에 맞선 신문이었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이 쿠데타로 일으킨 군사정부 출범 때부터 협력하지 않았다. 1968년에는 정부가 사건을 조작해 동아일보 임원들을 구속시키거나 남산에 끌고 가 심문할 정도였다. 이른바 ‘신동아 사건’이었다. 이 일로 본래 런던특파원으로 떠날 예정이었던 박권상은 대리 편집국장으로 임명됐다. 본래 편집국장직에 오를 사람이 당국에 의해 견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1969년 2월 박권상이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된 해에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당시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은 개헌을 추진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에 나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 언론사에선 3선 개헌을 지지했다. 동아일보는 아직 의견을 표명하지 않은 상태였다. 박권상은 고재욱 사장을 찾아갔다. “눈앞의 늑대도 무섭지만 등 뒤의 호랑이가 더 무섭지 않습니까. 국민의 시선, 역사의 평가가 더 무섭습니다”라고 말했다고 그는 회고록에 적었다.

 

그의 말을 들은 고 사장은 그에게 사설원고를 맡겼다. 박권상은 정부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면서도 개헌안에는 반대한다는 내용을 썼다. 그러나 그가 써서 올린 사설은 며칠이 지나도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10여일 후 고재욱 사장은 다시 박권상을 불렀다. 고 사장은 사내 젊은 기자가 실수를 저질렀는데 이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했다. 박권상은 반발했다. 회고록에 의하면 그는 “개헌 찬반이 국민적 초미의 관심사인데 거기에 대해 아무런 의사표시도 못하는 비겁한 동아일보가, 본질문제에 침묵을 지키면서 지엽적인 일을 문제삼을 때 오히려 영이 서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재욱 사장은 잠시 얼굴이 벌개졌다. 한참 뒤에 그는 책상 서랍에 있는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박권상이 고 사장에게 보냈던 원고였다. 박권상이 개헌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원고였다. 고 사장은 박권상에게 손세일 기획취재부장이 베껴 써서 제출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박권상의 독특한 필체를 가리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만큼 소신 있는 글을 쓰기 힘든 시대였다. 어렵게 세상에 나온 글 ‘헌법개정과 우리의 견해’는 8월 8일 동아일보 2면 우측 사설란에 실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사설을 읽고 “동아가 나를 치켜세우면서 그만하라는 것 아니냐”고 평했다는 설이 있다.

 

국내선 A급 퇴출 대상자 해외선 A급 소신 언론인

 

박정희 시대가 끝나도 언론탄압은 계속됐다. 1980년 박권상이 동아일보에서 ‘편집인 겸 논설주간’을 맡을 때였다. 6월 1일 군사통치기구인 국가안전보장위원회(국보위)가 생겼다. 박권상은 이를 옹호하는 사설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무시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한 달 뒤에 발생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 발표됐다. 계엄사령부가 김대중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배후조종자로 발표한 사건이었다. 김상만 동아일보 사장이 박권상을 불러내 점심먹으며 영어로 ‘몸조심하라’고 전한 날은 그로부터 이틀 전이었다.

 

국보위는 당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내용으로 기사를 쓰길 간접적으로 요구했다. 박권상은 말을 전하는 이에게 ‘왜, 그들은 직접 전화도 못 거나?’하고 쏘아댔다. 그런 뒤 박권상은 김대중 사건에 대해 원고지 8매 가량의 칼럼을 작성했다. 진실을 규명하고 재판이 공정하게 이뤄지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박권상은 “오늘의 현실에서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안전보장 없이 자유 없고 화해·단결 없이 안전보장 없으며 자유 없이 화해·단결 없다는 순환논리다”라고 썼다. 그의 사설은 검열당국에 의해 삭제 조치를 당했다. 8월 9일 그는 18년간 몸담았던 회사를 나왔다. 박권상은 이후 7년 간 기명칼럼을 싣지 못했다.

 

해외 언론에서 박권상의 일화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것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신문사에서였다. 미국 LA타임스의 샘 제임슨 기자는 ‘남한, 400명의 언론인 숙청’이라는 장문의 기사에서 대표적인 예시로 박권상을 들었다. 런던의 더 타임스는 1980년 8월 21일자 외신면에 톱으로 ‘언론숙청 캠페인’기사를 실었다. 동경특파원 피터 헤젤하스트 기자는 “그들(숙청된 자들) 가운데는 동아일보 편집인 박권상 씨가 포함되어 있다. 동아일보의 전 런던특파원이었던 박권상 씨는 구속중인 야당지도자 김대중씨에 대한 공정한 재판을 요구한 사설을 군검열관에 제시함으로써 정부당국을 화나게 하였는데, 그 사설은 인쇄되지 못했다”고 썼다.

 

10년간의 “낭인 생활” … 해외 전전하며 각종 저서 펴내

 

그 후 박권상에겐 근 10년간 이렇다 할 직장이 없었다. 그는 이 기간을 “낭인생활”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언론인으로서의 행보는 멈추지 않았다. 여러 나라에서 연구생활을 했다. 1981년에서 83년까지 미국 워싱턴의 우드로 윌슨 국제학자센터에서 북한을 연구했다. 85년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날아갔다. 두 학기에 걸쳐 영국의회 발전사를 익혔다. 86년 9월, 다시 워싱턴으로 가서 미국정치와 ‘미군정하의 한국 언론’에 관한 자료를 탐색해 논문을 발표했다. 같은 해 12월 프랑스에서 2주간 당시 유명했던 좌우동거정치를 직접 관찰했다. 1987년 9월엔 일본을 방문해 일본의 민주화 과정을 공부했다. 1988년 4월에는 영국 런던에서 3주간 영국의회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참관했다. 10월 중순에는 미국에서 한 달간 대통령 선거를 취재했다.

 

박권상의 화려한 해외 순방기는 책과 잡지 지면에 활자화됐다. 1981년부터 83년까지 미국에 머물면서 「미국을 생각한다」라는 저서를 펴냈다. 1985년부터 동아일보 월간지 신동아에는 ‘서구민주주의의 기행’이라는 제목의 시리즈 기사를 4년 간 연재했다. 87년 그간 잡지에 실었던 기고문을 묶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출판했다. 그 책에서 그리스, 스페인, 서독, 오스트리아의 민주주의를 다뤘다. 1992년 10월엔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편을 묶어 「대권이 없는 나라Ⅰ·Ⅱ」를 출간했다.

 

박권상은 동아일보에 몸담았을 때도 비행기를 탄 적이 있다. 1973년 8월 런던 특파원으로 파견돼 2년 4개월간 영국에 있었다. 그 시기의 경험과 고찰을 엮어 1979년과 81년에 「영국을 생각한다Ⅰ·Ⅱ」를 냈다. 영국의 민주정치, 교육 체계 등 선진 제도들을 주로 소개했다.

 

해외로 떠돌던 박권상이 언론계로 다시 돌아온 해는 1989년이었다. 시사주간지 ‘시사저널’ 창간 멤버로 참여해 편집인 겸 주필을 맡았다. 현재 시사저널에서 근무하는 이석 기자는 2014년 3월 12일에 “(박권상이) 시사저널, 또는 국내 시사주간지의 한 획을 그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1994년부터 고락을 함께했던 동아일보에서 다시 4년 간 고문을 맡았다.

 


흠결 남긴 KBS 사장 VS 후배 아낀 선배

 

그의 마지막 언론 생활의 무대는 방송사였다. 1998년 4월 20일 박권상은 KBS 사장으로 임명됐다. 2003년 3월 10일까지 4년 11개월 역임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국가권력, 자본은 물론 어떠한 사회세력의 부당한 압력으로부터도 벗어나 오로지 공공의 이익, 공공의 필요, 공공의 편의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특히 박권상은 특파원 시절 접한 BBC를 모범적인 공영방송의 본보기로 삼았다.

 

박 사장이 재직하는 동안 KBS뉴스 시청률은 급상승했다. 임기 말에는 신뢰도, 영향력 분야에서 방송뉴스들 중 1위를 차지했다. 경영 흑자도 냈다. 진홍순 전 KBS이사는 박권상 사장 시절 KBS가 “1999년부터 2000년 퇴임 때까지는 최소 220억 원에서 최대 1030억 원까지 당기순익을 올렸다”고 했다. 박권상은 ‘남북한 언론인 공동합의문’을 작성하는 데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2000년도에 한국 언론사 사장단 47명이 북한을 방문해 양측의 언론인 공동합의문을 작성했다. 원래는 북한이 ‘민족의 자주’와 ‘6·15 선언 지지’를 넣자고 주장했다. 이에 박권상이 반대하고 북측을 설득했다. 결국 두 용어는 빠지거나 다른 말로 대체됐다.

 

하지만 박권상은 모교인 전주고교 동창들을 임원으로 등용시 우대했다고 비난받았다. 당시 KBS노보는 “KBS 본사 국·부장급 이상 책임직의 15%를 박 사장이 졸업한 고등학교 출신이 차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2003년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는 여론조사에서 KBS 직원 505명 중 68.9%가 업무수행을 부정적으로 봤다고 발표했다. 응답자의 85.9%는 박 사장의 인사정책이 불공정했다고 답했다. 박권상이 사장으로 5년째 재임한 해였다.

 

이에 대해 조용중 전 연합통신 사장은 추모 글에서 “박권상이 고향 전북 전주를 사랑했고, 그곳 출신 후배들을 챙기고 돌보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전했다. 언론비평 전문지 미디어오늘의 이호석 기자는 2003년 3월 15일 기사에서 “박 사장이 특정고 출신을 우대한 것은 KBS 내부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며 “아무래도 친밀한 같은 학교 출신 후배들에게 의지하게 됐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엄정한 원칙을 세우지 못한 박 사장의 인사정책은 내부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아야 했고 더불어 인적청산이라는 개혁과제를 해결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다”라고 덧붙였다.

 


미국에서 마주한 선진 언론, 관훈클럽 탄생으로 이어져

 

박권상은 한국의 대표적 언론인 단체인 관훈클럽의 창립멤버기도 했다. 그는 1952년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다음 날 합동통신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박권상이 진정 언론에 눈뜬 건 3년 후였다. 그는 1955년 미국 국무성이 주관한 ‘신문기자 시찰 및 훈련계획’에 따라 초청대상자로 선발됐다. 6개월간 신문기자 10명에 정부공보실직원 1명과 함께 미국 저널리즘현장을 접하며 미국의 신문제작법을 배웠다.

 

귀국 후 박권상은 자신의 하숙집 관훈동 84번지에서 진철수, 노희엽, 조세형 등 미국연수 동료들과 한국 언론 현황과 기자의 발전방향등에 대해 활기차게 토론을 벌였다. 자연스레 저널리즘 연구와 기자들 간의 친목을 다질 수 있는 모임을 만들어 보자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마침내 1957년 1월, 이들은 ‘관훈클럽’을 결성했다. 창립회원은 18명이었다. 박권상은 서기를 맡았다.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당시 박권상의 기록이 “오늘날까지도 클럽 역사의 귀중한 사료로 보존되어 있다”고 말했다.

 

언론인들이 기억하는 박권상

 

언론 역사에 다양한 족적을 남긴 박권상은 2014년 2월 4일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31호실에서 치러졌다. 그는 지난 2월 7일 경기도 안성에 있는 유토피아 추모관에 안장됐다. 사망 원인은 4년 전에 발생한 뇌경색으로 추정된다. “박 전 사장(박권상)은 4년 전부터 찾아온 뇌경색으로 오랜 투병 생활을 하던 끝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고 2월 5일 헬스조선은 보도했다.

 

2월 4일부터 5일까지 약 48개 언론사에서 부고기사를 썼다. 동아일보는 5일 2면과 26면에 별세 소식을 전했다. 문화일보는 4일 1면에 나왔다. 조선일보는 5일 A28면 톱에 ‘"옳고 그름은 가려야"… 평생 기자로 살다 떠나다’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한국경제는 ‘관훈클럽 출범 이끈 박권상 前KBS 사장 타계’, 한겨레신문은 ‘‘80년대 언론자유 수호’ 박권상 KBS 전 사장 별세’라고 썼다.

 

5명의 전·현직 원로 언론인들이 관훈저널 2014년 봄 호에 그를 추모하는 글을 올렸다. 1970년대 그와 함께 동아일보에서 기자를 했던 재미 언론인 진철수 USA Briefing 에디터는 “박권상은 권력 앞에서 쉽게 휘지 않는 용감하고 끈기 있는 언론인이었다”고 말했다. 최맹호 동아일보 대표이사 부사장은 “성격 급한 후배가 따지고 들어도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소탈하고 자상한 인생 선배였다”고 했다. 언론사학자인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박권상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종합 언론인’으로 살았던 인물”이라고 전했다.

 

“자유의 혼불이 되어라”

 

박권상은 저널리스트의 자세로 두 가지를 강조했다. 하나는 진실에 관한 것이다. 그는 시사저널 창간호에 쓴 칼럼에 언론으로서, 언론인으로서 아마도 가장 소중한 것은 ‘진실’에 대한 신앙이라고 했다. 그것은 어떤 단편적인 사실이 아니라 나타난 사실을 둘러싼 포괄적이고 완전한 진실이라고 밝혔다.

 

다른 하나는 언론인의 독립성이다. 박권상은 1990년 10월 10일 쓴 정치평론에서 “‘자유혼’을 가진 신문이야말로 새 시대의 역군이 될 수 있다”며 언론계가 독립성과 공정성을 갖추길 설파했다. 그의 신념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2006년 잡지 ‘신문과 방송’에서 젊은 언론인들이 “어떤 이해관계나 편견에서 자유로워져야 하고, 여하한 정치적, 경제적 압력이나 유혹을 이겨내는 독립정신으로 무장”하기를 당부했다.

 

박권상은 진정 자유로운 혼이었을까. 최맹호 동아일보 부사장이 쓴 추모 글로 대답을 대신한다. “젊은 기자 시절 곽상훈 씨 등 쟁쟁한 정치인들이 국회의원을 하라고 여러 차례 제의했으나 거절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도 통일부 장관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언론의 길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박권상은 1929년 10월 25일 전라북도 부안에서 4남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네 살 때 부친상을 당했고, 큰형의 경제적 도움으로 대학을 다녔다고 알려졌다. 1958년 미국 노스웨스턴대 대학원 신문학과 석사학위를 취득, 1965년에는 하버드 대학의 ‘니먼 펠로우십’을 이수했다. 1995년 신문윤리강령개정위원회 위원장으로, 1998년에는 정부조직개편심의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93년 고려대 언론대학원 초빙 교수, 1997년 고려대학교 석좌 교수, KBS사장에서 퇴임 후 2003년 9월 경원대 신문방송학과에서 석좌교수로 임명됐다. 1991년 중앙언론문화상, 1991년 인촌상, 1996년에 한국언론학회상을 수상했다.

 

“저자세 고자세가 아닌 정자세로”

 

박권상은 1991년에 출간한 정치평론집 「저자세 고자세가 아닌 정자세로」에서 “옳은 언론, 바른 언론이 태어나려면 우선 언론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부분적 언론자유국인 우리나라는 옳고 바른 언론이 형성되기가 어렵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박권상이 글과 행동으로 보여줬다. 언론환경이 자유롭지 못해도 옳은 말은 할 수 있다. 의지가 있는 자에게 뒤따르는 조력자도 있었다. 그가 고뇌하거나 위기에 처했을 때 고재욱 사장, 김상만 사장이 적극 지지하고 보호해줬다.

 

그는 평론집에서 “자유언론이 사회의 선과 공동이익에 기여하기는커녕 결정적으로 해악을 끼칠 때, 그 결과가 어찌 될 것인가”라고 말했다. 그가 신변의 위협을 받으면서까지 진실을 밝힌 이유였다. 정자세로 살긴 어렵다. 그러나 가능하다. 어렵게 진실을 알리고 나면 어떤 심정일까. 박권상은 다음의 문장으로 회고록을 마쳤다. “독자가 읽지 않았고 읽을 수 없는 사설을 썼다는 것, 그것은 보람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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