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환

‘미전향장기수’ 보다 ‘비전향장기수’라는 용어가 더 익숙한 세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수업시간을 쪼개가며 보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악수장면이 머릿속에서 또렷하다. 비전향 장기수를 북으로 보내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솔직히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탄핵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러워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있다. 그런데도 <송환>이 금방 내려갈지 모른다는 걱정에 서둘러 극장을 찾은 건 12년 간 촬영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비전향장기수는 ‘사상전향을 거부한 채 장기 복역한 인민군 포로나 남파간첩’이라고 정의 내려져 있다. 과거에는 ‘미전향’이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아직 전향하지 않았을 뿐이지 종국엔 공산주의를 버릴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는 말이다. 그렇게 사상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옥에서 비장기수들은 3,40여 년 간 외로웠다. 수년 전부터 그들이 하나 둘 씩 출소하기 시작했고 2000년에는 송환이 이루어졌다. 

<송환>은 할아버지가 되어 출소한 장기수들의 일상을 집요하게 담아냈다. 12년의 내공 덕인지 할아버지들의 모습이 때로는 감동을 때로는 웃음을 준다. 두 시간 이십 분에 달하는 긴 다큐를 보고 내린 결론은 결국 같은 사람이라는 것. 영화는 인간답게 살고 싶었지만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슬픔에 대한 이야기였다. 장기수들은 야유회에서 김일성 찬가를 불렀고 여전히 꼬장꼬장한 자존심을 세우며 맑스 책을 권했다. 그런 것들을 떠나 결론은 사람에 대한 얘기였다. 장기수라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김동원 감독의 독백 중 하나다. 장기수들은 전향하겠다는 종이 한 장이면  교도소 생활도, 혹독한 고문도 끝낼 수 있다는 유혹과 겨뤄왔다. 그들을 무조건 오른쪽으로 끌어와야 했던 권력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신체적인 고문은 극악했다. 딸의 편지로 심약한 마음를 툭툭 건드리기도 했다. 사상, 체제를 위해서라고 단순히 결론짓기 어려운 문제다. 감독이 십 여 년에 걸쳐 얻어낸 대답은 의외였다. 어쩌면 체제와 사상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있었던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자존심 같은 것들. 그들을 굴복시키고자 했던 권력에 대해 끝까지 거부하고 저항하는 것, 그것이 인간으로서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었다. 

감독은 영화에서 “장기수는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는 편견을 버려!”라고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신문이나 방송뉴스에서 다뤄지는 장기수의 이야기에는 정작 그 사람이 빠져있다. 다만 그들이 감옥에서 보낸 세월이 숫자로만 살아있을 뿐이다. <송환>에는 선생들(감독은 영화에서 장기수 할아버지들을 선생이라 불렀다)이 살아있다. 전향 각서를 내고 풀려난 한 할아버지는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순수한 얼굴을 지으면서 말했다. “물고문을 하는데, 차라리 죽는 게 낫겠더라고…” 동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선지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 심정을 김동원 감독에게 털어놓는 할아버지의 얼굴은 진솔했다. 김 감독의 시각에서 그 당시에 전향을 했는지 아닌지는 중대한 관심사가 아닌 듯 보였다. 감독에겐 선생들 한분 한분을 그 나름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전부였다. 영화가 전하는 내용은 한두 시간 독대한다고 해서 나올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다. 12년간 감독과 그들 사이에 생겨난 신뢰가 고스란히 담긴 대화들이 오갔다. 영화의 마지막 독백은 다음과 같다.

“조 할아버지가 날 아들처럼 생각하신다는 말에 별 해드린 것이 없어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움이 이 작품을 마칠 수 있게 한 힘이었다. 조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

12년간의 촬영이라는 단편적인 사실이 품고 있던 ‘인간의 인간에 대한 성실함’이 절정에 달하는 대목이다. <송환>은 사람 사이에 생겨나는 신뢰를 보여줬다. 장기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영화를 잘못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다 같은 인간이라는 ‘틀 없음’ 안에서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는 진리를 확인시켜 준 영화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어 보인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진함이 많이 없어진 요즘이다. 봄이 됐지만 사람 사이는 여전히 얼어있다. 갈라져 부서지려하는 틈을 메워 줄만한 영화다.     

 
 
 성화주 기자   <nutb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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