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뜨거운 감자', 김대중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김대중은 1980년 7월에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2004년 1월 30일, 다시 재판정에 선 김대중에게 무죄가 선고 되었다. 신군부에 저항한 정당 행위에 대해서는 재심을 할 수 있도록 한 5.18특별법에 따른 결과다.

한국 현대사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김대중을 빼 놓을 수는 없다.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결성(이하 한민통), 3ㆍ1 민주구국선언 주도, 국민연합 결성, 민주화추진협의회 의장 등 그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중심에 서 있었다. 김대중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가 한국 현대사를 구성하는 한 축임에는 분명하다. 이것이 우리가 김대중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이유다.

43년간의 반체제 인사

김대중은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될 때까지 항상 반체제 인사였다. 첫 출마는  1954년이었지만, 그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면서부터다. 1970년 그는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박정희와 대결하게 된다. 유효표의 46%를 얻었고, 특히 서울에서는 과반수인 60%의 득표율을 보였다. 놀라운 선전이었다. 이 때부터 김대중은 야당의 주요 세력으로 떠오르게 된다.

1973년에는 국내외에 큰 파문을 일으켰던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김대중은 미국에서 한민통을 결성한데 이어 일본에서 한민통 결성을 추진 중이었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그를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했던 일이다. 그 후로도 김대중은 항상 집권당의 경계대상이었다. 사형선고, 암살기도, 6년간의 투옥, 2차례의 망명이 이어졌다. 1985년, 미국에서 귀국한 김대중은 김영삼을 비롯한 반체제 인사들과 함께 전두환 정권에 저항했다. 이들의 노력과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전두환을 몰아내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 세력은 극심한 분열 양상을 보인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대통령 후보자리를 놓고 갈등하고 분열했다. 결국 13대 대통령 자리는 신군부였던 노태우에게 돌아갔다.

김대중은 세 번째로 도전한 199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떨어지고 만다. 그에겐 정치적 '실패자'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이에 김대중은 ‘국민의 신임을 얻는 데 실패했다’는 말을 남기고 자발적인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그러나 그는 정치를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다면서 3년 뒤 정계로 복귀한다. 은퇴 번복은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김대중은 그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40.3% 지지율이었다. 이는 대한민국 최초로 이루어진 여야간의 정권교체이기도 했다.

북한의 외투 벗기기

대통령 김대중이 임기 중에 가장 주력한 일은 햇볕정책이다. 햇볕정책은 북한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을 통해 화해를 이루어 내려는 시도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그는 재임 기간동안 남북 경제 협력의 추진, 2000년 6월 15일의 남북정상회담, 이산가족 교환 방문 등을 추진하고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여년 전 민주화를 위해 흘린 땀방울과 함께 평화로운 남북 관계를 만들기 위한 그의 노력은 2000년 노벨평화상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햇볕정책에 대해서 ‘지나친 퍼주기’라는 비난의 시선도 적지 않았다. 2003년에는 대북 송금 문제가 불거졌다. 특검조사 결과 김대중의 재임 기간 중에 5천억 이상의 금액이 북한에 송금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물질적인 지원이 북한 주민의 복지 향상에 도움을 주었는지, 아니면 북한의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었을 뿐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지역감정을 업고

책 <편견없는 김대중 이야기>에서 전인권 씨는 김대중이 편견의 희생물이었다고 말한다. 지나친 오해와 의심 또는 지나친 존경의 대상이었다는 것. 선거 때마다 김대중은 전라도 지역에서 몰표에 가까운 득표를 했다. 전라도 지역의 무조건적인 지지는 위기 때마다 그를 받쳐주는 가장 큰 힘이었다. 대신 다른 지역에선 지나친 ‘김대중 죽이기’를 당해야 했던 것도 사실이다. 김대중은 지난 몇 십년간 정부 정책의 혜택에서 소외된 전라도의 한을 풀어낼 사람이라는 기대의 시선 혹은 두려움의 시선을 받아야 했다. 자의든 타의든 그가 깊은 지역감정의 골을 빠져나오기 힘들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아직도 뜨거운 감자다

김대중은 이제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뜨거운 감자라는 사실에는 아직 변함이 없다. 친DJ와 반DJ는 아직도 끝없는 논쟁 중이다. 사형수였던 1980년의 김대중과 무죄를 선고 받은 2004년의 김대중. 지금으로부터 또 24년이 지나면, 사람들은 그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까. 그가 어떤 정치인이었는지, 어떤 대통령이었는지에 대한 답은 그때로 미뤄두기로 하자.

김유리 기자 <kimyuri8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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