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신참 소방관 '다이고' 가 비번으로 쉬는 날이다. 고교후배와 길을 가던 중 우연히 고가도로 충돌사고 현장을 목격한다. 승용차가 고가도로의 난간을 들이받고 금방이라도 추락할 듯 흔들리는 위급한 상황. 차 안에는 부상당한 운전사와  꼬마가 두 명이나 있다. 긴급한 상황 처치와  구조 요청이 급선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차는 고가도로 바깥쪽으로 더 기울어 지고, 보다 못한  '다이고'가 나선다.  술렁거리던 군중들은 소방관이란 말 한마디에 일제히 '다이고'를 본다. 빨리  뭔가 해주기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출동! 119 구조대.  제 2화 소방관의 또다른 임무 편>
         
제가 무슨 천하장사예요?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몸을 던져 인명을 구조하는 119 구조대원. 화재 현장의 뜨거운 불길과도 용감히 맞서 싸우는 소방관. 우리 머리 속의 소방관은 만능 해결사다. 그러면 만화나 텔레비젼 밖의 실제 소방관은 과연 어떨까?


한가한 오후 2시경, 경기도 고양 소방서 119 구조 본부를 찾았다.  4평  남짓한 사무실에 들어서자 컴퓨터 앞에서 잔무를 보던 오렌지색 제복의 유재홍(28) 대원이 고개를 든다. 부시시한  긴 앞머리 탓일까?  상상하던 소방관 '아저씨'보다는 만화 <출동! 119구조대>의 젊은 소방관 '다이고'와  닮았다.

"풍동에서 두 명 구했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구조 활동을 떠올리며 더듬듯 말을 잇는다. "이방 저방 열어보다가 우연찮게 혼자 들어갔어요. 이불에 덮여 있어서 그냥  지나칠 뻔했는데… 2명이 연기에 질식돼서 누워 있더라고요." 둘 다 거구였다고 회상하는 유재홍 대원의 어깨가 아까보다 탄탄해 보인다. 그가 화염 속에서 연기를 헤치며 두 사람을 구조해 나오는 장면을 머리 속에서 그려보다가,  "제가 천하장사인가요? 저 혼자 어떻게 해요. 발견하자마자 신호를 보냈죠, 여기 사람 있다고. 다른 대원이 와서 같이 부축해 나왔어요." 갑자기 상상은 깨진다. 그러고 보니 그는 '다이고'처럼 다혈질인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풋내기 티가 나지 않는다. 마른 체구, 몇 번 깜박이지도 않는 부리부리한 눈, 쉽게 경계를 풀지 않는  사무적인 표정. 혹시 어릴 적 꿈도 소방관이었냐는 질문에  군대 가기 전까지는 직업군인이 되고 싶었다며 처음으로 멋쩍게 웃는다. 
   
" 전혀 안 무섭진 않죠. 그래도 직업이니까…"

<출동! 119 구조대>가 소방관 만화라기보다 '싸우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면, 유재홍 대원은 소방관도 하나의 직업임을 강조한다.  구조에 대해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때 기분이 어떠냐는 유도성 질문에도 "물론 좋지만 매일 하는 일인데요"라며 "어차피 직업이니까"를 꼭 덧붙인다.

멋있어 보이고, 무엇보다 어릴적 꿈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간다는 기대로 지원한 특전부대. 그러나 막상 군대 생활은 그의 생각과는 달랐다. 제대 후 소방관 시험에 응시하게 된 계기는 친했던 군대 동기가 먼저 구조대원이 된 것을 보고 나서이다. " 안하던 공부를 하려니까 힘들더라고요." 그는 어려운 긴급 구조대 시험을 단 한 번만에 붙은 것이 단지 운이 좋아서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처음 생각대로 직업 군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특전대에서의 강도 높은 훈련은 소방관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기본적인 체력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지옥같이 고된 훈련을 마치고 특별 구조대원이 된 '다이고'도  임용 첫날 입은 오렌지색 제복이 썩 어울렸다. 지난 2년간 유재홍 대원에게 그것이 잘 어울려 온 것처럼.

프로의 규칙

 "내가 규율에 대해 지겨울 만큼 말하는 의미를 아나? 보통 회사나 학교랑은 달라! 한 순간이라도 방심했다가는 목숨을 잃는 직장이기 때문이란 말이다! "
                                                - <출동! 119 구조대 . 제2권 P.100 우에기 부대장의 말>
 
만화 속의 신참 소방관 '다이고'는 규율보다는 감에 의존한 플레이로 선배 소방관들을 당황시키곤 한다. 그런데 실제로도 화재가 나면 무엇보다 인명 구조를 1순위로 하는 유동적인 작전이 진행된다고 한다.

"모든게 원리 원칙대로 될 수는 없죠. 평소엔 이랬는데 상황에 나가면  반대로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때마다 상황을 파악해서 그 틀을 응용하는 거죠. 예를 들어 아무도 없는 공장에 불이 나서 화재 신고를 받고 출동하다가도 교통 사고로 찌그러진 차안에 다친 사람이 있다면 방향을 돌려야죠. 지시 상황이 무전기로 와요."

119가 심부름센터 번호인가요?

3시 32분, 후곡 마을 긴급 구조 출동. 천장의 네모난 스피커에서 출동명령이 떨어지자 신속하게 뛰어나간다. 보이지 않던 나머지 3명의 을조 대원들까지 태운 구조차가 순식간에 싸이렌을 울리며 출동한다. 잠겨있는 아파트에 어린 아이가 혼자 갇혀 있었다. 고리를 비틀어 자물쇠를 따고 들어가서 아이를 구출했다. 상황 무사종료. 그런데 구조본부로 돌아오는 길에 또 한번의 출동 명령이 떨어진다.

"들어오다가 또  나갔어요, 똑같은 걸로. 갓난아기가 한 명 있다고…." 숨돌릴 틈도 없이 방향을 틀어 도착한 곳은 화정동의 다세대  주택. 이번에도 혼자 갇혀 있던 아기는 무사히 엄마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많아요.그런 일…." 그날 뿐 아니라 평소에도 119 제보의 약 25%가 문 개방 관련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문을 여는 데 지불하는 경비가 아까워서 119에 신고하는 경우도 있다. 안에 어린 아이라도 있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을 때는 제보를 자제해주길 당부한다. "매일 사고현장을 대하지만, 사고라는 게 조금만 주의하면 충분히 안 일어날 수 있거든요. 안전에 대해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면. 안전 불감증이 건물이나 다리만 무너뜨리는게 아니에요. 사소한 것부터, 운전을 할 때도 안전의식을 갖고 하면 자기에게도 좋잖아요." 

그러나 마지막까지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극한 상황에 처해서 구조를 기다리는 시민의 얼굴이다. "그래도 출동할 때는 기다리는 쪽에서 급하게 생각하는거 아니까,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신속하게 나가서 처리하는게 목적이죠." 출동 명령을 듣고 급박하게 뛰어나가던 119 구조대 유재홍 대원의 믿음직한 뒷모습이 떠오른다.

김재은 기자<dewed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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