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를 부르짖는 한국의 모습은 종말을 예비하는 광신도의 모습과 유사하다. 21세기에 다른 나라들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한국은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영어는 한국이 세계화를 이룩하는데 걸림돌이 됐고 결과적으로 언제나 영어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물론 한국은 이 콤플렉스를 버리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을 했다. 이제 한국에서 10년 이상 영어를 배워도 실전에서는 'hello' 한마디조차 건네기 어려운 현실을 통해 30년 이상이나 계속 실행되었던 문법 위주로 진행되는 영어교육의 문제점도 파악을 했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도 영어 콤플렉스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21세기의 주인공들에게 세계화의 날개를 달아주자는 취지'에서 1997년 3월부터 초등학생들도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원어민들과 거의 의사소통이 안되는 등 과거 문법 위주의 영어 교육 방식이 실패하자 이제는 색다르게 듣기와 말하기 위주의 교육 방식으로 바꾸었다. 아직은 전문적인 지도교사의 부족과 교재 부실 그리고 영어 고액과외의 우려 등 '졸속시행'이라는 반대의 여파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정책에 있어서 극히 우유부단한 한국 정부가 영어 조기교육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데서 영어에 대한 한국의 갈망을 엿볼 수 있다.

한국에서 영어는 계급을 나타내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건 못해도 영어만 잘하면, "넌 영어 잘하니까…"하고 한 '등급' 올라갈 수 있다. 엘리트 아닌 엘리트가 되는 것이다. 외국에서 살다 오는 것이 이제 흔해졌지만 초·중·고등학교에서는 아직도 외국에서 살다 온 아이는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된다. 외국에서 오랜 기간 살았기 때문에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김지연(21)씨는 이로 인해 시험을 거치지 않고 일본에서 열리는 화상회의에 참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학교는 일본에서 열리는 화상회의에 참가하게 되어서 참가자를 뽑았어요.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우리 학교만이 그 회의에 참가했기 때문에 한국 대표나 다름없었고 그 만큼 학교에서도 참가자를 뽑는 데 신중했어요." 참가 희망자들은 시험과 면접은 물론 뽑힌 후에도 상당 기간 영어교육을 받았어야 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김지연씨가 뒤늦게 참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자 학교측에서는 즉각 이를 받아들였고 그녀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회의에 참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몇 달 후에 한국에 나갈 생각으로 한국 관광가이드 책자를 찾는데 미국에서는 구하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한국관광공사에 한국에 나갈 재미교포인데 안내책자를 좀 보내 달라는 내용으로 편지를 보냈어요.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 연락이 없길래 이번에는 같은 내용이지만 영어로 보냈어요. 그러자 이번에는 너무도 자세하게 여러 권의 책자를 보내주더군요."

외국인(영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한국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철저하게 친절한 사람과 완벽하게 외면하는 사람이다. 이윤나(19)씨가 백화점에 아이쇼핑을 가서 친구와 향수 구경을 하고 있을 때 점원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는 표정으로 다가왔지만 이윤나씨와 그녀의 친구가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순간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물론 모두가 그 점원처럼 겁을 먹는 것은 아니다. 영어를 못하더라도 최대한 친절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에 오랜만에 와서 친구와의 약속 장소를 찾지 못한 재미교포 김선아(27)씨는 길을 가던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무시하고 그냥 지나쳐 버리거나 건성으로 가르쳐주어서 이번에는 영어로 길을 물었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영어로 길을 물었더니 그때는 그 사람이 저의 손까지 잡고 약속장소 바로 앞까지 친절하게 데려다 주었어요. 가면서는 혹시 내가 지루해 하지 않을까 영어단어를 띄엄띄엄 말하며 이야기도 하고요."

한국인들이 이토록 영어를 '찬양'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비난'하며 타파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에스페란토'라는 언어를 보급하며 더 이상 강대국의 언어가 약소국의 언어를 망치려는 것을 막으려 애쓴다. 에스페란토 협회의 멤버인 김형근씨는 영어가 절대 세계의 공용어로 자리 잡힐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영어는 그것을 제2외국어로 접하는 사람들에게 이상한 소리로 들릴 뿐입니다. 특정한 언어를 배울 때에는 먼저 듣기와 이해력이 우선 이루어진 후에 말하기가 되는 법인데 말하기로 가기도 전에 듣기나 이해에서 막히니 실패할 수 밖에요." 그러면서 그는 일본의 예를 든다. 소리의 체계가 지극히 단순한 일본인에게는 영어의 발음이 넘기 힘든 장애물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에스페란토가 영어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생각이다. 에스페란토가 생긴지 10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보급률이 심히 낮기 때문이다.

더 이상 강대국에 의해 약소국이 언어까지도 지배당하지 않게 한다는 에스페란토의 취지는 그럴 듯하다. 하지만 또 다른 언어를 만드는 수고를 굳이 하기보다는 각 나라가 자신의 언어에 충실한 것이 보다 중요하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듯이 특정한 나라에 가면 그 나라의 언어를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프랑스는 자존심이 강한 나라로 유명하다. 거리는 물론 박물관에서도 영어로 된 표지판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또한 프랑스인에게 영어로 길을 묻고 대답을 듣지 못한 사람의 경험담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방 번호를 말하라는 경비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현관 밖에서 몇 시간씩이나 기다려야 했던 최윤화(22)씨도 한숨 섞인 경험을 이야기한다. "불어를 못한다고 계속 영어로 이야기해도 절대로 영어로 말을 안하더라구요. 계속 불어로 무언가를 말하더니 나중엔 인터폰까지 꺼버리고요. 결국은 한참을 기다리다가 다른 사람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갈 때 그 뒤에 딸려서 같이 들어갈 수 있었어요."

'선진국의 모임'이라는 OECD의 홈페이지를 가보면 프랑스인의 당당함을 느낄 수 있다. 홈페이지를 단지 두 가지 언어로 볼 수 있게 해 놓았는데 하나는 물론 예상대로 영어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불어이다. 프랑스가 OECD에 속해 있는 국가 중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큼 가장 정치 경제적으로 강한 나라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홈페이지를 불어로 볼 수 있게 해 놓은 것은 무의식적으로 타국의 사람들에게 프랑스인은 영어를 못한다는 생각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 아닐까?  
 
영어는 발달된 언어가 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영어에 막대한 시간을 투자함에도 불구하고 영어의 문맹률이 한글의 문맹률 보다 더 높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단지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가 정치나 경제적으로 힘이 있다고 해서 그 언어까지도 우리의 것보다 훌륭하다고 대우해 주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영어로 말을 걸어오면 친절히 반기는 많은 한국인들의 행동을 단순히 IMF 이후 해외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기특한' 노력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한국은 영어가 만사의 '보증수표'가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 때다.     

최지희 기자<dewed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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