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2학년 성민영(가명, 22세)씨는 지난 여름 방학부터 유명 어학원에서 토익(TOEIC) 강의를 들었다. 학교에서 2000년 입학생부터 적용하기로 한 영어인증제를 이수하기 위해서다. 3학년 1학기까지 영어인증제를 이수해야 하는 규정 때문에 성씨는 올해 안에 토익 시험에서 750점 이상을 따려 한다. "한 달 수강료만 해도 10만원 가까이 되지만 제대로 졸업하려면 학원비야 어쩔수 없죠." 정보인증제 때문에 인터넷 정보검색사 자격 시험도 준비하고 있는 그는 억지로 하는 영어공부, 컴퓨터 공부가 재미없다.

90년대 후반부터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을 중심으로 학생들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어학능력과 컴퓨터 활용능력을 요구하는 인증제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영어인증제는 학생들이 졸업하기 전까지 토익(TOEIC), 토플(TOEFL) 또는 텝스(TEPS) 시험에서 학교측이 정한 일정 점수 이상을 받아야 학사증을 수여하는 제도이다. 정보인증제를 이수하려면 공인된 컴퓨터 자격증 취득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이외에도 재학 기간동안 일정 시간 이상 사회봉사를 하게 하는 학교도 있다.

대학가 졸업시즌이 다가오면 몇몇 졸업생들이 인증제 때문에 학사증을 받지 못했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인증제를 실시하는 대학에서는 졸업이수 학점을 채운 학생이라도 외국어, 컴퓨터 등 대학에서 요구하는 자격 기준을 통과하지 않으면 졸업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1999년에는 졸업인증제 때문에 대학원 진학이 취소된 성균관대 학생이 학교를 상대로 학사수여 청구소송을 냈다. 그러나 학생측이 패소함으로써 대학 졸업인증제의 강한 구속력이 확인되었다.

내가 이걸 왜 해야하는 거야?

지난 6월 말,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이하 대교협)는 그동안 일부 대학에서 실시해 온 졸업인증제를 전국 193개 4년제 대학에서도 2003년 졸업생부터 적용시킬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제 더 많은 대학들이 '입학하기보다 졸업하기 어려운 대학 만들기'에 나섰다. 대학들은 외국어, 컴퓨터 등에서 졸업자격 요건을 제시함으로써 졸업생의 자질을 높일 생각이다. 숙명여대 교무처장 이영옥씨는 "그 정도 실력은 갖춰야 졸업 후 취업을 하는데 좀더 유리할 것으로 봅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대학생들은 자기에게 필요하지 않은 자격 시험 때문에 속앓이를 하고 있다.

내년 2월 졸업을 앞둔 김성훈(경희대 법학과, 23세)씨는 얼마 전부터 영어 인증시험인 텝스(TEPS)를 준비하고 있다. 경희대에서 6년째 실시하고 있는 영어 및 전산능력 인증제(CRS) 때문이다. 그동안 학과 공부하느라 영어나 컴퓨터 자격시험을 준비할 여유가 없었지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공부를 할 생각이다. 이번 학기에 인증제를 꼭 이수해야 계획한 시기에 졸업을 할 수 있다.

"영어공부나 컴퓨터 자격증 준비는 필요한 사람들이 알아서 할텐데, 자기 전공분야에 필요없는 자격증을 모두에게 요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친구들 중에는 인증 시험 준비 때문에 휴학한 사람들도 있다. 올해 2월 인증제에 통과하지 못해서 학사 수여를 받지 못한 졸업생들을 생각하면 자기에게 꼭 필요한 자격이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이 미리 준비해야 한다.

조영섭(성균관대 경영학과, 21세)씨는 요즘 학교 근처 사회복지관에 다니고 있다. 졸업인증제인 삼품제 중 30시간 이상 봉사활동을 해야하는 인성품(봉사활동)을 이수하기 위해서다. 인성품은 강제적이긴 해도 사회에 봉사하는 일이기에 보람이라도 있지만 정보품(컴퓨터)은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는 모든 학생들에게 영어나 컴퓨터 활용 능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면, 일률적으로 부담을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여러가지 인증 분야를 마련해 놓고, 학생들이 그 중에서 몇 개만 선택하게 하면 좋겠어요." 일방적으로 인증제를 강요하는 것보다는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줘서 인증제를 좀더 유연하게 적용하는 게 학생들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중 부담은 학생 몫

대학들은 교육과정 안에서 학생들의 어학능력, 컴퓨터 활용능력을 향상시키려 하기보다는 학생들이 개인적으로 준비해서 실력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학교 수업만으로는 인증제를 이수하기 힘든 학생들이 찾는 곳은 사설 학원이다. 학과 공부에, 학원 공부까지 해야하는 학생들은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한 달에 7만원부터 30여 만원까지 하는 학원비, 교재비도 학생들에게는 큰 부담이다. "대학들이 학교 수업으로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우리한테 책임을 떠넘긴 것 아닌가요?" 권기범(서울대 재료공학부, 20세)씨는 졸업 전까지 텝스(TEPS) 시험을 의무적으로 치러야 한다는 게 불만이다.

매달 유명 어학원의 토익, 토플 시험대비반은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등록이 빨리 마감된다. 종로 파고다 어학원에서 개설하고 있는 토익, 토플 시험대비반(초급)의 경우에는 등록이 시작된 날부터 2일이 지나지 않아 정원제한에 이른다. 이 강의를 듣는 수강생의 70% 이상을 대학생들이 차지하고 있다. 사설 학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강료가 저렴한 대학부설 언어교육원, 정보교육원의 토익, 토플 시험 대비반에도 대학생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졸업인증제와 진짜 실력의 관계는?

졸업인증제가 확대 실시된 데에는 대학이 실용적인 능력을 갖춘 인재를 배출해야 한다는 정칟사회적 배경이 작용했다. 지난 해 8월 김대중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 4차 인적자원개발회의에서는 졸업인증제를 대학이 수행해야할 과제로 제시했다. 이에 이어 지난해 12월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기업들은 대학이 현장에서 활용될 수 있는 실무적인 능력을 갖춘 인력을 배출해야한다고 대학에 요구했다.

그러나 대학들이 실시하고 있는 졸업인증제는 현장에서 제 효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 채용 담당자 박용씨는 대학 졸업인증제에서 요구하는 자격들이 현장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토익점수가 높아도 수준있는 영어 회화를 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어요. 인증제 때문에 취득한 컴퓨터 자격증들도 기초적인 게 대부분이라 회사에서 다시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기업 측에서는 오히려 졸업인증제 때문에 필요한 인력을 놓치기도 해 인증제가 달갑지 않다. 올해도 삼성전자 신입사원 채용시험 합격자 중 한 명이 대학에서 요구한 인증제를 이수하지 못해 합격이 취소됐다.

박영근(고려대 경영학과, 23세)씨는 내년 2월 졸업을 앞두고 얼마 전부터 토익 공부를 시작했다. 고려대 안에서도 다른 과에 비해 까다로운 졸업요건을 제시하고 있는 경영학과에서는 졸업 전까지 토익, 토플시험에서 일정 점수 이상 받거나 CPA 같은 국가고시 1차에 합격, 또는 경영학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도록 하고 있다. 이 중에서 한 가지를 이수하면 졸업논문을 쓰지 않아도 된다. "토익 점수만 잘 맞으면 졸업논문을 쓰지 않고서도 경영학 학사로 인정해 준다는 건 문제가 있죠." '영어점수=졸업자격'이라는 이상한 등식에 따라 졸업가능 여부가 정해지는 셈이다. 이처럼 졸업생들의 자질을 높이겠다는 졸업인증제가 오히려 전공에 대한 전문성을 떨어뜨린 경우도 있다.

잃어버린 '인증'의 의미

대교협의 발표대로 내년 하반기부터 전국의 4년제 대학들이 졸업인증제를 실시한다면 대학생들은 이제 표준화된 공통 졸업자격 시험을 치러야 한다. 대부분의 대학 졸업생들의 실력은 모두 '토익 750점 이상, 토플 550점 이상, 컴퓨터 자격증 한 개 이상 취득'이라는 기준에 따라 비슷한 수준으로 평준화될 것이다. 그 때쯤에는 또다시 실무 능력을 갖춘 '기능인'을 분별해 내기 위해 새로운 족쇄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새로운 인증제가 계속 시행될수록 인증서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학생증과 다를 바 없게 된다. 실력을 공인해 주어야 할 인증제가 우리 대학사회에서는 제 의미를 잃어버린 게 아닐까?

취재: 박수련기자, 윤선아 수습기자

글: 박수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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