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대 석유 사업으로 엄청난 부를 획득한 뉴저지 스탠더드석유회사의 록펠러 사장은 경영에서 물러난 뒤 자선사업에 몰두하면서 대학 설립을 위해 6,0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재벌이 경영권을 자손에게 물려주는 현상을 일상적으로 여기는 한국인들에게 미국 기업인의 기부 활동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런 상황에서 평생 땀흘려 세운 굴지의 기업을 자식이 아닌, 직원에게 물려주고 은퇴한 한 벤처 기업인이 화제가 되고 있다. 정문술 미래산업 사장이다.

강남역에 위치한 미래산업 11층 사무실에서 만난 정문술 전 사장(63)을 만났다. 인터뷰 내내 한결같이 경어체로 얘기하던 그는 전직 벤처기업 사장이라기보다 나이든 목사님처럼 친절하고 소박해 보였다. 정 전 사장은 지난 1월, 미래산업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동안 못 만났던 지인들을 만나거나 후배 벤처기업인들에게 경영 컨설팅을 해줬습니다." 은퇴 후 하루 생활을 묻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회사 다닐 때보다 더 바쁘다며 웃는다.

반도체검사장비업체인 미래산업은 IMF시대에도 매출비 순익이 30%을 웃돌 정도로 건실한 벤처회사다. 미래산업은 반도체 분야를 넘어 99년부터 인터넷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미국 라이코스와 합작한 ‘라이코스 코리아’를 운영하는 중이다. 미래 산업의 화려한 경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회사의 설립자인 정문술 전 사장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기술 개발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로 전량 수입에 의존했던 반도체 검사 장비를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이를 바탕으로 미래 산업은 지난 해 10월 한국능률협회가 주관한 새천년 지식경영 대상을 수상하였다.

자기 자신과의 약속

은퇴를 발표한 지난 1월 4일, 정문술 사장은 이사회에서  “경영권을 세습하지 않고 회사 임직원에게 물려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겠다”며 대표직을 사임했다. 후임에 장대훈 부사장이 선임됐다. “회사를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셈이죠.” 현대그룹 '왕자의 난'같이 형제들간에 경영권 다툼이 빈번한 국내 기업의 현실에서 그의 행동은 큰 주목을 받았다. 언론은 정사장의 은퇴를 '아름다운 뒷모습', '신선한 충격'이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정작 화제의 주인공은 너무나 담담하다. 오히려 당연히 할 일을 했음에 대한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뿐이었다고 한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남은 인생은 평생 가꾼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생산적 기부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정 전 사장은 은퇴할 때 이미 이런 결정을 내렸다. 은퇴 후 정 전 사장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생명공학과 정보통신이 결합된 새로운 학과를 설립하는 조건으로 개인재산 300억 원을 내놓았다. "미래 산업에 있을 때 신기술을 개발하면서 고급 인력이 필요한 적이 많았지요." 정보기술혁명 이후 앞으로 도래할 생명공학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거죠. 이번 투자를 통해 생명공학과 정보통신이 융합된 기술인력이 양성되기 바랍니다."
 
벤처에 대한 오해

기업인들 사이에서 정 전 사장은 '벤처계의 대부', '국내 벤처 1호'라 불린다. 그만큼 벤처 업계에서 존경받는 기업인이다. 그런 그에게 정현준 게이트 같은 금융 사기 사건은 안타까운 일이다. 벤처 업계의 혼탁상을 여실하게 드러낸 사건이기 때문에 정현준 게이트 대한 그의 입장은 단호하다." 정현준씨는 기업인이 아닙니다, 벤처의 탈을 쓴 금융 브로커이지요." 그는 진정한 벤처인은 순수하다며 미래산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세 가지 요인을 들었다. 정경유착을 하지 않은 점, 정부의 중소기업지원정책에 의존하지 않은 점, 고리대금업 아닌 사채를 쓴 점이 바로 그것이다." 기업은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기업과 정부의 관계, 기업윤리에 대해 지적하는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다.

"매일 매일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지난 18년 동안 간 쉴 새 없이 일을 했지요. 쉬고 있는 지금은 마음이 편합니다. 같은 음식을 먹어도 더 맛있는 것 같더군요." 그는 일과가 없는 날엔 집 근처 청계산에 올라간다고 한다. 당분간은 아무런 계획이 없다.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가족과 사회를 위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주변에 정치를 권하는 사람도 있지만 명예를 추구하고 싶지 않아요."

매일 15개의 신문을 보지만 그는 정치면은 읽지 않는다. 보더라도 제목만 겨우 읽을 뿐이다. 그는 정치인의 후원회 초청장이 오면 뜯어보지도 않고 버린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쌓아올린 부를 사회에 환원할때는 아낌없는 태도를 보였다. 아름다운 퇴진과 부의 모범적 사회 환원을 실천했던 노 기업인이 앞으로 어떤 '뒷모습'을 남길지 지켜볼 일이다.

서주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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