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탁탁' 컴퓨터 자판 소리와 기자들의 발걸음이 분주한 마감시간에 한겨레신문사를 찾았다. 편집국의 바쁜 공기를 밀어내며 연두색 남방에 카키색 넥타이 차림의 정연주씨가 다가왔다. 즐겁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쉰 여섯의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간단한 소개 뒤 빠르면서도 잘 정리된 말들이 열정적으로 이어졌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해인 1970년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한 그는 5년 뒤 신문사에서 강제 해직되었다. 그 후 함께 해직된 동료들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하 동아투위)를 조직했고 그것이 문제가 되어 전두환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82년 미국으로 건너가 학업에만 열중하던 그에게 한겨레는 새로운 시작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다시 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겐 한겨레가 축복입니다"라며 웃는 그의 얼굴에서 행복함이 느껴진다. 89년부터 한겨레신문 워싱턴 특파원을 지낸 그는 작년 6월, 18년만에 귀국해 현재 한겨레 논설주간으로 활동하고 있다.
 
언론이 극복해야 할 4가지 과제

언론을 항상 마음에 품고 살아 왔다는 그는 지난 27년 간 동아투위에서 언론자유수호를 위해 활동해왔다.
"언론의 자유를 위해서는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 광고주와 사주로부터의 독립, 이데올로기로부터의 독립, 그리고 신문의 상업성 탈피. 이 4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사실 90년대 들어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압력은 미비하다며 19955년 조선일보 노동조합신문 여론조사를 예로 들었다. 당시에도 기자들이 편집권 침해요인으로 정치권력을 든 비율은 3%밖에 되지 않았다.

오히려 언론 자유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광고주다. 그는 신문이 정치권력과 사주로부터 독립하고 이데올로기와 선정주의에서 해방되더라도 광고주의 압력은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시장 경제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자본이지요. 신문의 수입구조와 재벌기업 광고의 높은 비율 때문에 신문은 자본의 영향력에 예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신문 구독료도 일종의 카르텔이라며 역시 없어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보다 더 무서울 순 없다

"신문에 의해 여론이 조장된다는 말은 세 명이 전체 여론을 조정한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이런 현상은 생겨나서는 안 되는 잘못"이라고 단호히 말한다. 신문이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자체가 우리 언론의 문제점이라는 것이다. 이는 방송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대자본과 사주가 있는 신문이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음을 의미한다.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이 중요한 것도 미디어간의 정당한 비판 문화를 정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함을 상실한 채 여론이 하나로 몰려가는 것은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면에서 한겨레는 균형 있는 여론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볼 수 있지요." 그는 "특히 조선일보와 같은 극우 언론이 있는 사회에서는 다른 목소리를 내는 신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겨레가 없는 한국은 한쪽 날개만 있는 새와 같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물론 한겨레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한겨레는 현정권에 들어  정부 쪽에 치우친 여당지가 됐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들어왔다. 이에 대해 그는 지난 3월에 쓴 칼럼을 통해 창간 초보다 옅어진 한겨레의 차별성 있는 논조와 제도권으로 편입된 측면을 '깊이 반성한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프로가 되자

언론이 바로서기 위해서는 기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시대에 따라 기자에게 요구되는 정신은 변해왔다.
"일제 때는 독립투사, 군부 독재시절에는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이 기자들에게 요구되었다면 현재는 프로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는 요즘 기자들은 프로정신이 부족하다며 그 중에서도 신뢰가 가장 큰 생명이라고 했다. "정직한 기사, 신뢰를 줄 수 있는 기사를 써야 합니다. 앞으로는 프로정신을 담은 기사를 쓰는 기자가 얼마나 그 신문사에 많으냐가 신문의 우열을 가리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는 또 지금은 인터넷의 발달로 더 이상 기자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시대라고 했다. 그는 인터넷을 혁명적인 도구라고 표현한다. 최근 일어난 미국 테러보도는 과거 전쟁에 보도에 비해 다양한 시각을 담고 있다. 이 또한 인터넷의 영향력이다. 미국의 메이저 언론에만 의존하지 않고 비주류 언론의 목소리 등 다양한 목소리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들 반성해야 합니다

얼마 전 신문지면을 통해 몇몇 지식인들의 공방전이 가시화되었다. 그는 요즘 들어 지식인들끼리의 싸움이 늘면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는 일제시대와 독재시대, 그리고 지금까지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대개 상황의 불가피성을 말해요. 또 항상 강자의 편에서 강자의 논리를 펴죠."
그는 지식인들의 이러한 행동은 인간적으로 불성실한 태도라며 정당화될 수 없다고 했다. 최근 교황 바오로 2세가 기독교의 죄악에 대한 참회를 한 것처럼 우리나라 지식인들도 반성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언론인들의 정계 진출에 대해서도 그는 안타깝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정계에 나가있는 언론인들이 정치에 이용을 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미국 같은 곳에서는 언론인이 자연스럽게 정계에 진출한다는 그의 말에, 그도 정계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대답은 시원스러운 'NO'. "나같이 조·중·동이 대놓고 싫어하는 사람을 누가 데려 가겠냐"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저는 죽는 날까지 좋아하는 글을 쓰며 보람을 느끼고 싶습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즐거운 분위기로 쉽고 자세히 말을 전하려는 세심함을 보였다. 건강과 시간이 허락한다면 전국을 여행하고 살아온 이야기를 담은 책을 남기고 싶다는 정연주씨. 그에겐 언론을 향한 자신의 신념에 대한 누구보다 강한 자부심이 있었다.

이기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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