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한한 신입생이 들어왔다. 그 아이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특별하고 소중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삶을 사는 주변사람들과 나 자신에 익숙해져 있던 나. 그 신입생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귀에 몹시 거슬렸다. 특히 남자친구 자랑은 끝이 없었으니! "내 남자친구가 입시 준비할 때 논술도 도와줬어. 내 남자친구는 너무 똑똑해. 남자친구와 같이 유학 가려고 해. 내 남자친구는 상도 많이 받았어. 오늘  몹시 바쁜데도 내 얼굴 보려고 왔다가 책이랑 케이크도 사주고 간 거 있지."

나와 나의 남자친구는 사귄지 이제 1234일이 가까워 온다. 일명 중고커플. 남자친구의 말로는 명품커플. 나는 "명품도 중고는 가격이 떨어진다"고 되받아쳐버린다. 이런 나에게 신입생의 남자친구 자랑은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내 자신에 더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자신의 남자친구가 최고로 멋지다고 생각하는 게 무슨 잘못인가? 오히려 예쁜 사랑을 하는 그 아이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나는 내 남자친구 이야기를 솔직하게 못하는, 남의 사랑을 비웃는 엉터리이다.           

누구나 자신의 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특히 자신과 가까이 있는 사람-딸이나 아들, 여자친구나 남자친구, 아내나 남편-을 이야기할 때에는 흥분하기 십상이다. 우리 사회는 대놓고 자랑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자신도 모르게 자랑이 시작되면, 이내 듣고 있던 주위 사람들은 '팔불출'의 딱지를 붙여줌으로써 말하는 사람의 기를 확 꺽어버리곤 한다. 나 역시 내 입에서 남자친구 이야기가 흘러나올 때 마다 늘 조심스럽고, 혹시라도 듣는 사람이 싫어할까봐 걱정된다. 물론 마음속에는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자친구 이야기 한 보따리를 활짝 펼쳐본 적은 없다.      

친구들 앞에서 늘 내 좋은 점만 밀해 주는 남자친구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남자 친구 자랑을 하는 것 보다는 남자친구 욕을 해버리는 편이 오히려 상대방과 대화하기에는 편하다. 그러나 이것도 못할 짓이다. 내가 당장 친구들과의 즐거운 대화를 위해서 남자친구 흉을 본다면, 친구들은 나의 꽁꽁 싸놓은 남자친구 자랑이 훨씬 큰 것을 모른다. 그리고 친구인 내 편을 들어주기 위해 함께 내 남자친구를 욕한다. 하지만 정작 내가 남자친구와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다정한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친구들은 배신감을 느낀다. 또 이미 내 남자친구에 대한 친구들의 신뢰는 깨진 후이다.


결국 해답은 솔직함이다. 내가 내 남자친구를 사랑하는 만큼 나는 내 남자친구의 멋진 모습을 자랑할 권리가 있다. 그것을 억지로 돌려 말하려고 하면, 나의 쑥스러움은 줄어들지 몰라도 듣는 사람들은 재미없고, 남자친구는 기분 나쁘다. 내가 신입생의 남자친구 자랑을 듣기 싫었던 것은 아마도 나의 거짓말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 남자친구 이야기를 그 아이만큼 씩씩하게 할 용기가 부족했으니까 말이다. 다른 친구들의 야유 섞인 부러움의 시선을 느껴보는 것도 어쩌면 남자친구를 사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지만 나는 그 특권을 행사할만한 '솔직함'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이었다.    

여기까지 읽은 이들은 이미 눈치 챘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신입생과 한 학기가 끝날 때까지 친해지지 못했다. 나의 솔직하지 못함을 자각하게 했다는 그 이유로 그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진 이상 몹시 부끄럽다. 나는 신입생의 당당한 남자친구 자랑을 배우고, 그 아이와 친해져야 한다. 이제야 내 남자친구가 나에게 가지고 있던 불만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남자친구를 꽤 많이 좋아하면서도 그것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내 자신의 모습들. 그것은 내가 남자친구를 그만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을 것이다. 미안해. 신입생에게 배울게.

"내 남자친구는 절대로 전화를 먼저 끊지 않아. 텔레비전에서 봤다면서 식당에서 밥먹기 전에 언제나 물수건으로 내 손을 닦아줘. 피곤한 나를 집에 데려다 줄 때면,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하면서 뛰어가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줘. 또 내 남자친구는 삼수해서 원하는 대학에 붙었을 때보다 나를 만난 것이 더 기쁘대. 내 남자친구는 자신이 하는 일을 정말 사랑하고 마음이 따뜻해."

                                                           그저께 미국에 간 남자친구가 보고 싶은 L양 씀

덧붙임: 늘 남자친구 이야기하면서 투덜거리는 S양, 왼쪽과 오른쪽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W양, 헤어지라는 언니들의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H양. 이제 그녀들의 차례.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시원한 가을이 오면 밤을 새면서 S, W, H가 솔직하게 남자친구 자랑을 우리 앞에서 늘어놓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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