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지 않으면, 명랑하지 않으면, 누구도 날 좋아해 주지 않을 거라고 강박적으로 되뇌었을 것이다. 여하튼 그리하여, 어느 날, 나는 모든 에너지를 잃었다.’

따뜻한 감성이 느껴지는 글이다. 권혁란(42). 그녀는 페미니스트 칼럼니스트다. 지난 4월 창간 10년 만에 완간된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if)>의 편집장을 지낸 권혁란 씨는 ‘페미니스트 글은 도전적이고 투쟁적이다’라는 편견을 보란 듯이 뒤집어 놓았다. “어제 술 마시고 집에 못 들어가서 조금 정신이 없어요. 훌륭한 말은 못해 줄 거 같아요” 만나자마자 그녀는 친근하게 말을 건네온다. 그녀가 말하는 자신의 글,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여성 문제에 눈뜨기

<이프> 완간 호 이후 한동안은 그저 푹 쉬고 싶었지만, 여기저기서 그녀의 글을 보고 싶어했다. 현재 그녀는 오마이뉴스, 경향신문, 여성부 웹진 위민넷, 웹진 미즈엔 등에 글을 올리고 있다. 여전히 그녀의 글들은 페미니즘과 맞닿아 있다. “이프에 있을 때는  보도 자료도 많이 받고 여성계 소식 등을 좀 더 쉽게 접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혼자 해야 하니까 아이템 잡기가 조금 힘이 드네요.” 한 달에 여섯 번의 마감을 해야 하기 때문에 버는 돈에 비해 정신적 압박감이 크다고 한다. 

처음부터 여성문제,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회운동은 당시 대학을 다니던 80년대에 민주화 운동에 동참한 것이 전부였죠.” 권 씨는 임용고시에 떨어지면서 여성이 처한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국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남편과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나왔다. 두 사람은 똑같이 임용고시를 준비했다. 남편은 합격하고 권 씨는 떨어졌다. “그 당시 국어교사를 뽑을 때 남자는 65명, 여자는 5명을 뽑았어요.” 이때부터 그녀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상황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는 억울해서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결혼 생활이 8년을 넘어갈 때 그녀는 점점 억울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프> 완간호에서 그녀는 ‘아이 둘을 분명 사랑하지만 종일 발버둥 치며 홀로 돌보는 것도 억울했고, 어쩌다 돌봐주는 남편이 주변에서 자상하고 아름답고 배려 깊고 훌륭한 인물이라고 칭송받으며 의기양양해 하는 것도 억울했고......’라며 그 당시의 억울함을 말했다. 그 때 신문에서 여자의 욕망을 아는 잡지라는 <이프>의 창간 소식을 읽었다. “이프는 아무 경력도 없는 나에게 글을 쓰게 해주었고 극에 달해있던 나의 피해의식을 가능성으로 바꿔 주었어요.”

가진 것 없는 편집장

<이프>안에서 권 씨는 객원기자, 출판팀장, 이후 편집장이 됐다. 편집장이 되었지만 그녀 안에 존재하는 열등감 때문에 한동안 힘들었다고 한다. “저를 제외하고 거의가 여성학 석 박사들이었어요. 그런 학위가 없는 기자들이라도 여성학 교양은 다 들었는데 저는 책 몇 권 읽은 게 고작이었죠.” 그녀는 자신에게 맞는 리더쉽을 찾기로 했단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역할을 해야 겠더라고요.” 권 씨는 직접 진두지휘를 하기보다 기자들이 자신의 특성을 살리며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도록 해주었다. “에디팅은 최소한의 것만 했어요. 글을 편집할 때 기자의 문장과 인터뷰이의 의견을 굳이 자르고 쉽지 않았어요”라며 <이프>식 글쓰기는 ‘하고 싶은 말은 다 해버리자’였다고. 이런 그녀의 성향으로 권 편집장 아래의 이프는 항상 특대호였단다. 이런 그녀의 리더쉽은 함께 일한 사람들로부터 ‘권 편집장이랑 일할 때가 정말 환상적인 팀웍이었다’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프>가 끝나지 않아야 하는 이유

<이프>에서는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여성이 느끼는 오르가즘을 이야기했고, 군대문제를 정면으로 집어냈다. <이프> 홈페이지는 그 때부터 남성들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많은 남성들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논리적으로 접근하려하지 않는다”며 의도적으로 상처 주는 말을 하는 남성들을 볼 때면 아직도 멀었다고 느낀단다. 하지만 그녀의 글은 욕을 먹기보다 지지를 받는다. 그녀 또한 그들과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절대 남의 눈치를 보고 글을 쓰지는 않아요. 다만 국문학을 전공해서인지 자연스럽게 문학적이고 감성적인 글들이 나오더라고요. 청승맞은 거죠 뭐.(웃음)” 다소 투쟁적인 주장의 글들을 따뜻하게 풀어내기. 바로 그녀만의 글쓰기다.

<이프>는 경영난을 견디지 못해 폐간했다. 그녀는 “여성들을 위해 고쳐야 할 것이

아직도 많은 상태에서 <이프>가 끝나버린 것이 두고두고 안타깝다”고 말했다. 97년 <이프> 창간 10년 후인 요즘 여성총리, 여성 장관이 배출되는 등 눈에 보이는 여성의 사회적 지워가 높아졌다. 하지만 아직도 <이프>만큼 이 사회에서 부당하게 피해를 받았던 여성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매체가 없단다. 지금은 재기에 완전히 성공한 가수 백지영을 처음으로 보듬어 준 곳도 바로 <이프>다. 지난 2003년 <이프>는 안티미스코리아페스티벌에서 당시 어느 곳에서도 불러주지 않는 그녀를 무대에 서게 했다. “예전에 여성에 대한 문제를 터뜨리고 싸웠다면 이제 그걸 풀어나가야 하는 시점인데.......”

나의 글, 제자리를 찾아서

요즘 절에 다닌다는 그녀는 남에 대한 배려와 이해심이 늘어났다고 한다. “내안의 치열했던 부분이 점차 옅어져가고 있는 거 같아요.” 이 사회가 갖는 잘못된 것들에 대해 분노하고 싸우고 말해야 하는데 자신이 갖고 있는 분노가 과연 정당한가라는 의심도 생겨났다고 한다. “예전에는 힘든 상황에 처한 여성들의 편에서만 이야기 했는데 요즘은 다른 입장에서도 바라보게 되는 거예요.” 그녀는 현재 글을 쓰는 것이 조금 힘든 상태지만 곧 괜찮아 질 거라고 말한다. “지금의 과도기를 넘어서면 좀 더 성숙한 단계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될 거 같아요. 그 때 자신 있게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치열함과 따뜻함을 함께 가지는 권혁란만의 글. 감성적 페미니스트인 그녀의 글이 방황을 끝내고 다시금 제자리를 잡을 수 있는 날이 보다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저작권자 © 스토리오브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