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11시 2호선 이대역. ‘5...4...3...2..1.!’ 스크린 도어가 열리자마자 달려나가는 여대생들로  발 딛을 틈도 없다. 먼저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는 사람만이 지각을 면할 수 있다. 내 코가 석자인데 같은 학교 학생이라고 봐줄 수 있겠는가. 서로 먼저 타기 위해 치열한 몸싸움을 벌이는 상황. 내 뒤에 서계시던 우리 아버지 또래의 한 아저씨는 안타까움과 감탄이 섞인 한 마디를 외친다. “어이쿠, 우리 예쁜 딸들 고생하는 구나!”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우리 딸

나는 나름 아버지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외동딸’이다. 내가 자랄 동안 아버지는 ‘NO’라고 한 적이 거의 없던 것 같다. 용돈이 떨어졌다고 하면 바로 별 말없이 용돈을 더 주신다. 핸드폰 요금이 많이 나와도 ‘대학생이니 연락할 때도 많겠지’라며 웃어넘기신다. 아버지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거부할 수 없는 ‘쥐약’이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사뭇 다른 존재이다. 내 가까운 친구 A군에게 아버지는 공포다. 만나면 호통이요, 걸리기만 하면 혼나기 일쑤다. ‘왜 맨 날 술만 마시냐’ ‘공부는 안하고 밤늦게 들어오냐’ 아버지의 호통은 끝나는 법이 없다. 과연 아버지는 여동생 B양에게는 어떨까? 가끔 애정 어린 꾸중이 있을 뿐 심한 꾸지람은 없다. ‘허허허허허’ 딸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물렁살’ 이다. 아들에게 엄격하고 무서운 존재인 반면 딸에게 아버지는 든든한 보호막 같은 존재이다.

한 번에 세게 구르면 너무 아프다

아버지와 딸. 이런 아름다운 스토리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이어지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우리 예쁜 딸들은 평생 딸로만 남을 수는 없다. 정확히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딸’은 딱 대학생까지만 이다. 대학교 4학년, 24살 나이에 대학문을 나가는 순간 아버지로 상징되는 사회의 탄탄한 보호막은 ‘와르르’ 무너진다. 사회는 이제 ‘딸’이 아닌 ‘성인’ 으로 대접한다. 오히려  잘못하다가는 ‘여자라 곱게 자라서 저런다’는 딱지가 붙기 십상이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자란 여성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보호받고 자란 딸’이라는 선입견은 따라다닌다. 금세 ‘우리 예쁜 딸’ 은 보호하는 벽에서 넘어야 할 벽으로 바뀐다. 때문에 일하는 여성들은 ‘여자라서 저런다’ 는 소리를 안 듣기 위해 깨지고 밟혀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정도로 강해져야만 한다.

반면에 ‘우리 자랑스러운 아들들’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남자는 강해져야 한다’는 말을 항상 듣고 자란다. 학교나 군대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 과정이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겠지만, 최소한 사회에 나갔을 때 적응은 빨리 할 수 있다. 사회는 어차피 서바이벌 게임이니 딸이나 아들이나 힘들기는 마찬가지이다. 사회가 아들들에게 더 만만하겠냐 만은 최소한 쓴 맛을 보는 것에는 면역력이 생겼다. 첫발을 디딘 여대생에게 사회는 푹신한 침대에서 구르다 바로 모래바닥에서 구르는 격이 된다. 갑자기 한 번에 구르면 많이 아프다.

누구보다 이런 슬픈 결말을 잘 알고 있는 것은 여대생이다. 새내기적 수업시간에 한 교수님은 “여학생들은 외박도 하고 가출을 해서라도 당장 아버지 벽부터 넘어라”고 말씀하셨다. 딸도 성인도 아닌 위치에서 4년이란 유예기간 동안 여대생들은 이 푹신한 침대와 모래 바닥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몸부림친다. ‘여자라서 보호받고 자라 저

렇다’, ‘군대 안가서 고생을 몰라 저렇다’는 수식어를 떼기 위해 여대생들은 스스로 한계에 부딪히고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일찍 사회를 맛보기 위해 고된 인턴 생활도 하고 생판 모르는 해외에 나가기도 밤새 술을 마시며 아버지에게 반항하기도 한다. 결국 스스로 넘어야 할 벽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했다. ‘우리 예쁜 딸’들은 이제 사회라는 정글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부모의 보호가 높아질수록 딸들의 극복은 힘들어 진다. 아버지여, 이제 ‘우리 예쁜 딸’이 아닌 ‘우리 강한 딸’로 클 수 있도록 도와 달라. 딸들이 사회에 나갔을 때 덜 고통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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