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중국이 세계 초강대국으로서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불과 100여년 전 만해도 중국은 무능한 전제 군주와 부패한 관료들 아래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있었다. 과도한 세금과 폭정에 견디지 못한 중국의 청년들이 1911년,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혁명의 씨앗을 키운 청왕조

중국의 변방민족에 불과했던 만주족은 세력을 키워 1644년 한족의 나라인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베이징에 입성했다. 만주족은 다수의 한족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노력했다. 황제의 권한을 확대해 권력을 집중시켰고, 한족의 관직 진출을 제한했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전제 군주의 뛰어난 통치 역시 이민족인 청왕조의 성장에 한몫을 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 서양 열강들의 침략과 함께 어린 황제가 연속적으로 즉위하면서 청왕조의 힘은 날이 갈수록 약해졌다.

1800년대 말부터 중국 대륙에서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 신식교육을 받고 돌아온 유학생들은 현실을 비판하고 청왕조에 반대했다. 쑨원도 그 중 한 사람으로 일본에서 ‘동맹회’라는 조직을 만들고 통일적인 혁명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유학생들은 청일전쟁 패배직후 군사력 강화를 위해 조정에서 만든 신군(新軍)에 참여하여 장병과 하급 사관들에게 혁명사상을 전파했다. 청왕조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새롭게 만든 군대는 어느덧 자신들의 목을 죄어왔다.
 
‘마지막 황제’의 탄생 

 1911년 10월 9일, 중국의 남부 도시 한커우에서 한 혁명단체가 폭탄을 제조하던 중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러시아의 조계지*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워낙 폭발이 컸기 때문에 청당국의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혁명단체가 발각되고, 그 자리에 있었던 3명의 혁명가는 즉결 처형을 당했다. 이에 10월 10일 한커우의 옆 도시인 우창에서 병사들과 학생들이 봉기하였다. 혁명 소식은 각 성에 전파되어 각 도시의 군인과 학생, 상인 등으로 구성된 집단들이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치며 관리와 만주족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다.

쑨원과 혁명군이 요구한 것은 공화정이었다. 그러나 청 왕실은 당시 정계의 최고 실력자인 위안스카이를 내각총리대신으로 하는 군주정을 추진하고 있었다. 혁명군들은 이를 서태후 시대로의 회귀라고 받아들였다. 그들은 1912년 1월 1일 난징에서 쑨원을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하고 독자적인 공화국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쑨원은 자신의 군사적 기반이 약하기 때문에 공화국이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는 어렵게 성공한 혁명의 지속을 위해 내각총리대신인 위안스카이에게 총통 자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막강한 군사력과 권력을 가진 위안스카이가 공화정을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계산적이고 권력욕 강한 위안스카이는 고심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대세가 기울어진 싸움에서 청왕실은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생명과 충분한 재정지원을 보장해달라“고 부탁했다.

빛 바랜 혁명의 꿈

위안스카이는 총통 자리에 오른 후 남경을 수도로 정한다는 쑨원과의 약속을 저버린다. 베이징에 머물며 영국, 프랑스 등 서양 열강의 차관을 도입해 재정기반으로 삼았고 국민당을 해산시켰다. 1915년부터는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욕을 공개적으로 보였다. 공화제가 민중의식이 낮은 중국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1915년 12월 황제로 추대되었지만 서양 열강과 국민들의 반발로 그의 꿈은 좌절된다. 이런 와중에 1916년 6월 위안스카이는 사망하고 중국 대륙은 지방 군벌들이 권력다툼을 하는 각축장으로 변한다.

혁명의 핵심내용은 ‘반만(反滿)’이었다. 다수의 한인들은 만주족의 무능함이 중국 현실에 혼란을 불러왔다고 생각했다. 신해혁명은 계급과 성별에 상관없이 같은 민족이라는 민족정서를 자극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혁명은 한족의 만주족으로부터의 독립인 것이다. 그러나 한족은 다른 소수민족인 몽고족과 티벳족은 정작 독립시켜주지 않았다. 다른 민족에 대한 배려는 없고 한족 자신들만을 위한 혁명이었다. 이런 모순에 대한 벌인 것일까. 신해혁명 후 중국은 공산당과 국민당의 치열한 전투 후 ‘두개의 중국’으로 갈라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계지 - 조약에 의하여 한 나라가 그 영토의 일부를 한정하여 외국인의 거주와 영업을 개방한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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