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차르트의 첫 사랑 알로이자와 부인 콘스탄체와의 대담

“모차르트? 초등학교 때부터 위인전으로 읽었잖아~”
위인전을 읽어서 그를 다 알았다고? 음악신동으로 포장된 모차르트가 그의 전부일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위인이기 전에 평범한 인간이었던 한 남자를 만나보자.   

여기 모차르트가 사랑한 두 여성이 있다. 첫사랑이었지만 모차르트를 버리고 다른 남자를 택한 알로이자. 많은 사람이 첫사랑을 못 잊듯 모차르트도 알로이자를 쉽게 잊지 못한다. 꿩 대신 닭이었을까? 모차르트는 알로이자의 여동생, 콘스탄체를 아내로 맞는다. 질투심이 강하고 낭비도 심해 서양음악사에서 최고의 악처로 유명한 콘스탄체. 두 사람이 기억하는 모차르트는 어떤 모습일까?

모차르트와 두 여인의 만남

알로이자 : 제가 모차르트를 처음 만난 때는 1777년, 제가 16살이었고 그는 21살이었어요. 그는 당시 예비 소프라노였던 저의 노래솜씨에 반해 사랑에 빠졌죠. 저도 그의 재능에 상당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지만 결국 우린 헤어졌어요. 그의 아버지께서 반대하셨거니와 명랑하고 천진스러운 그에게서 왠지 모를 나약함이 느껴졌거든요. 그럴 수밖에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과잉보호 하에서 영재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사회성도 부족했고 많이 의존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누구나 인정하고 있듯 그는 천재였죠. 5살 때부터 작곡활동을 시작했으니 말이에요.

콘스탄체 : 저는 모차르트가 저희 집에서 하숙하고 있을 때 친해졌는데 엉뚱하게 우리 둘이 사귄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어요. 엄마는 소문을 빌미삼아 모차르트에게 결혼을 요구했고 결혼하지 않는다면 거액의 돈을 달라고 협박까지 했지요. 그러니 어떡하겠어요?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저와 결혼하게 됐죠. 하지만 결혼한 후 우리의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어요. 찢어지게 가난했거든요. 그는 천재였고 그의 음악은 아름다웠지만 듣고 있자면 화가 났어요. 우리가 그토록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근심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아름다운 음악이라니..... 사람들은 현실 속의 고통을 음악으로 승화시켰다고들 말하더군요. 오페라 <돈조반니>, <마술피리>, <클라리넷 협주곡> 등은 가난 속에서 피워낸 꽃이라구요. 또 남들은 제 낭비벽 때문에 땔감도 못 살만큼 가난하게 됐다고 수근거렸죠. 하지만 그의 낭비벽도 만만치 않았어요. 어릴 때부터 궁정출입을 해왔기 때문에 과소비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거든요. 남편은 천상 자유주의자라 후원받을 수 있는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어요. 생활은 점점 더 궁핍해졌죠.

음악신동, ‘자유’를 원했다

알로이자 : 그가 매번 대주교와 다퉜던 건 자유주의 성향 때문이었어요. 대주교는 그의 자유로운 여행을 반대하고 신하로서 복종하길 원했지만 모차르트는 그런 구속이 싫어서 벗어나려고만 했죠. 결국 1777년과 1781년, 두 차례에 걸쳐 해고와 고용을 되풀이한 끝에 어떤 귀족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 직업인이 돼요. 자유주의 성향은 오페라에서도 드러나요. 모차르트는 11살 때부터 오페라를 만들었는데 당시 만연했던 영웅이야기를 거부하고 귀족들의 위선을 풍자해요. 기존의 도덕에 얽매이기 싫어 자유와 평등이라는 주제를 선택하고 등장인물에게 감정을 불어 넣었어요. 개성을 부여하기 위해 대본도 철저히 음악에 종속시키죠. ‘음악으로 말하는 드라마’에서 ‘드라마로 된 음악’으로, 오페라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천재성은 바로 그의 자유주의에서 비롯됐다 할 수 있어요. 뿐만 아니라 1784년 카톨릭를 신봉하는 당시 사회에서 성당을 다니지 않고 오히려 카톨릭에 반하는 ‘프리메이슨’ 단체에 입회했답니다. 평범한 것을 싫어했던 그의 성향을 잘 보여주죠. ‘프리메이슨’ 단체는 자유, 평등, 박애를 표방하며 초교파적 사랑을 강조해 카톨릭의 탄압을 받고 있었거든요. <마술피리 K.620>에 이 단체의 비밀의식이 음악적으로 묘사돼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죠. 역시 그의 개성은 알아줘야 해요.

콘스탄체 : 네. 맞아요. 언니 말대로 그의 자유주의 성향은 대단했어요.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얻은 다양성의 거름 위에 자유주의적 성향이 가미돼 그 특유의 음악이 탄생했다고 생각해요. 덕분에 저는 모차르트가 죽고 나서 음악유산의 관리자가 돼 남편이 남긴 악보를 출판해 수입을 얻었어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재혼해서 남편에게 모차르트 관련 자료를 집대성하게 했죠. 지금의 모차르트 연구에 초석을 마련했어요. 동시에 부유해질 수 있었으니 그의 음악은 제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죠.

아폴론처럼 고귀하기만 했을까?

알로이자 : 콘스탄체! 너는 그의 아름다운 음악을 그저 돈으로만 평가하는구나.(째려본다) 모차르트 이후 모차르트주의가 범람했다고 해요. 그만큼 어법, 수법, 양식을 모방하는 사람이 많았죠. 모차르트 음악은 밝고 맑음의 대명사로 여겨져 사람들은 모차르트를 ‘아폴론적’* 음악가라고 말했어요. 베토벤의 강렬한 음악이 등장한 후에는 모차르트 음악의 고귀한 미, 완전한 형식, 순수한 조화, 맑고 명랑함의 성격이 더욱더 강조되죠. 하지만 베토벤 시기의 음악 평론가 로흘리치(1769~1842)는 모차르트 음악에 ‘비극적인 것’이 들어있음을 느꼈다고 해요. 다른 사람들도 모차르트 음악에서 비아폴론적인 요소를 감지했다고 하는데 이를 그저 비아폴론적이라고 하지 않고 “데모니슈”*하다고 불러요. 모차르트 음악의 불가사의한 힘, 인간을 초월한 곳에서 발휘되는 힘이 바로 “데모니슈”한 것이죠.

원인모를 죽음... 250년간의 미스터리

알로이자 : 오페라,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등 수많은 음악을 남긴 채 그는 1791년 12월 5일 35세라는 짧은 생을 마감해요. 그의 죽음이 타살일 것이라는 추측을 바탕으로 <아마데우스>라는 영화가 제작될 만큼 그의 죽음에 대해 논란이 많아요. 과로로 사망했다는 설,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오는 신경성질환으로 사망했다는 설, 궁정 음악인으로 있을 당시 틀에 매인 궁정 의례 때문에 생긴 요독 증세를 치료할 때 사용한 수은중독으로 사망하였다는 설 등...... 저도 어느 것이 사실인지 모르겠어요.

콘스탄체 : 제 생각에는 어렸을 때부터 워낙 천연두, 복부열, 편도선염 같은 여러 질병을 앓았던 허약체질이었고 아버지를 따라 십여 차례에 걸쳐 유럽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면서 몸에 무리가 가서 일찍 죽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뭐, 그가 일찍 죽는 덕분에 제 생활이 여유로워졌지만요.

알로이자 : 어쩜...,, 콘스탄체는 악처로 유명할 만해요. 남편의 죽음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할 수 있다니.... 어떤 이유로 그가 세상을 일찍 떠났든지 간에 우리가 영원히 기억할 600여곡의 음악을 남겼고 인간 예술에 풍요로움을 더한 모차르트야말로 진정한 인류 최대의 유산자라고 생각해요.

명랑하지만 나약했고 소극적이었던 모차르트. 속박을 싫어하고 자유를 사랑했던 그이기에 현실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래도 이 두 여인 모두 모차르트 음악을 사랑했다. 지금까지 그가 세계적 위인으로 인정받으며, 탄생 250주년으로 온 세계가 들썩이는 것도 바로 모차르트만의 위대한 음악세계 때문일 것이다.

*아폴론적 : 거칠고 힘이 넘치는 야생과 반대되는, 다정다감하고 부드러운 것. 이성적이고 조화로운 고요한 미의 세계를 의미한다.

*데모니슈 : 악마적, 초인적. 창조력의 근원은 데모니슈한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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