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고엽제 피해 아동 봉사활동

10년간의 베트남 전쟁은 사망자 약 120만 명, 부상자 약 300만-400만 명을 내고 미군의 철수로 끝났다. 베트남전이 끝난 지 30년이 지난 오늘까지 피해자들은 대를 물리며 계속되고 있다. 전쟁 중 미군이 사용한 ‘고엽제’ 때문이다.

베트남 고엽제 피해 아이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위해 2006년 2월 20일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고엽제 피해 아이들이 모여 있는 ‘프렌드십 빌리지’에는 나와 함께 2주 동안 봉사 할 4명의 미국인과 2명의 한국인, 그리고 10명의 베트남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피해 아동 시설, ‘프렌드십 빌리지’

우리가 봉사활동을 한 곳은 ‘프렌드십 빌리지’(Friendship village)라는 고엽제 피해아동 보호소였다. 고엽제 피해아동의 자활을 위해 독일, 프랑스, 일본 등의 NGO가 1993년에 설립한 단체이다. 5살에서 20살 사이의 120명가량의 아이들이 살고 있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전쟁 중에 고엽제에 노출되거나 어머니의 모유를 통해 다이옥신이 전염된 아이들이었다. 대부분 심각한 건선, 습진 등의 피부병이나 다운증후군 등의 지능장애, 팔, 다리의 기형을 지니고 있었다.

봉사활동을 총괄했던 베트남인 쩡Jung(23)은 “아이들은 이곳에서 3-4년 동안 간단한 치료를 받고 수학, 영어와 같은 기초적인 교육과 자수, 재봉 등 직업 훈련을 받게 된 후 가족에게 돌아간다”고 말했다. 굽은 손으로 장미꽃 자수를 두는 아이들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밝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한 달 넘게 걸려 만든 자수는 3000원 정도 가격으로 팔린다. 시설 밖을 나간다고 해도 자수공예를 직업으로 삼고 돈을 벌기는 불가능 해 보였다. 게다가 아이들의 부모 역시 대부분 고엽제 피해자여서 시설을 나가면 당장 생계가 막막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베트남 봉사활동의 참가 인원은 총 17명으로 4명의 미국인, 3명의 한국인, 10명의 베트남 현지 참가자였다. 특히 미국인 참가자들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미국인 조아나Joanna(23)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지식은 그동안 책을 통해 읽은 단편적인 것이 전부였단다. 그녀는 ”고엽제 피해 아이들을 만나며 과거를 반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시설과 지원이 더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심한 장애에 비해 학교 수업에도 충실하고 영어 공부에도 열심이었다. 한국인 참가자 박정하(21)씨는 “장애 아동들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밝고 씩씩하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과거와 현재의 고통보다 더 나아질 내일을 생각하며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봉사자들은 아이들이 먹을 음식을 재배하는 유기농 농장에서 채소 수확을 하거나 나무를 심었다. 유기농으로 재배한 작물들은 하나하나 벌레를 제거해야 하기 때문에 농약으로 재배한 식물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갔다. 담당자인 펑Pung(30)에 의하면 유기농으로 재배한 허브는 치료를 위해 약으로 쓰이고 채소 작물들은 아이들 음식 재료로 쓴다고 한다. 참가자 박준현(23)씨는 달팽이로 한국음식을 만들거라며 부지런히 달팽이를 모았다. 미국이나 베트남 봉사자들은 장난인지도 모르고 음식이 기대된다며 웃고 있었지만 곧 음식을 먹어야 된다는 생각에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처럼 국적이 다른 봉사자들은 언어 장벽에도 어느새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인류 최악의 물질, 고엽제

우리 팀은 한 주에 한 번 고엽제에 관한 공부를 하고 토론을 했다. 강의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으며, 현재 프렌드십 빌리지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한 미국분의 이야기로 진행되었다. 고엽제는 10년 동안 베트남 전역에 뿌려졌는데 당시 미국 군인들은 고엽제가 인체에 해로운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베트남 종전 이후 동료들이 치명적인 고엽제 후유증을 겪으면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고엽제의 더 큰 문제는 피해자 자신 뿐 아니라 고통이 2세,3세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때문에 고엽제 피해지역에서는 대를 이어 기형아가 출산된다. 베트남 전 때 고엽제에 노출된 베트남인은 200만-500만 명 정도인데 이들 중 상당수의 자녀들이 기형아로 태어났다. 참가자 박정하(21)씨는 “베트남 참전군인의 증언과 종전 직후 태어난 기형아들의 사진자료를 보며 고엽제 피해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강연 내내 고엽제 기형아 아이들의 사진을 돌려보며 봉사자들은 숙연해 졌고 몇몇 사람은 분노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고엽제의 위험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한 한국인 참전용사의 증언에 따르면 “밀림에서 고엽제가 쏟아지면 시원하기 때문에 샤워까지 했다”고 한다.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에 따르면 전쟁에 참여했던 한국군 중 10만여 명이 이미 고엽제 후유증으로 사망했으며 12만여 명 정도가 여전히 고통 받고 있다고 한다.

고통 분담은 모든 사람의 의무

베트남은 GNP 310달러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이다. 전쟁이 끝난 이후로 경제가 빠르게 좋아지고 있지만 아직도 사회 복지 시설은 턱없이 부족하다. 고엽제 피해 경우 대부분 사회 시설 지원은 베트남 정부가 아닌 국제 NGO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NGO에서 운영하는 시설조차 충분치 않다. 우리가 봉사활동을 했던 마을 수용인원도 고작 120명 정도였다. 우리가 만난 한인 교포 분은 “그나마 프렌드십 빌리지는 하노이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좋은 시설”이라며 자신이 선교하는 곳의 아이들은 하루에 먹는 음식 재료비가 150원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전쟁은 끝났다. 베트남에도 한류열풍이 불만큼 총을 겨누던 전쟁의 상처는 아물었다. 참가자 텐리Tenly(35)는 생각보다 아이들이 너무나 씩씩하게 자라고 있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상황에도 아이들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이제 전쟁의 가해자, 피해자 모두 전쟁에 대한 죄책감과 상처를 털어낼 때다. 역사는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이제 베트남에 희망을 심을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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