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서구 방화동의 아파트. 2월 28일, 한낮에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1월 14층 한 세대에서 불이 나 주민 95명이 대피했던 곳이다. 입주민이 이웃을 빨리 대피시켜 인명 피해를 막았지만 방화문이 닫혀 있지 않아 연기가 급속도로 퍼졌다.

지금은 어떨까. 불이 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아파트 15개 층에서 방화문이 닫힌 곳은 5개 층에 불과했다. 같은 아파트 나머지 4개 동은 모든 층의 방화문이 열려 있었다. 화재 시 유독가스 확산을 막아야 하지만 많은 주민이 방화문을 열어 놓거나 물건을 복도에 쌓아뒀다.

이곳은 장애인과 고령자가 많이 사는 영구임대 아파트다. 거동이 불편한 주민이 많아 화재에 특히 취약하다. 복도식 아파트라서 복도 난간 위에 창문이 있다. 방화문을 열어 놓으면 세대 내에서 발생한 연기가 외부로 배출되지 않고 곧바로 계단실로 번진다.

주민들은 벽돌이나 돌, 책장 등 무거운 물건을 괴어 방화문이 닫히지 않게 고정했다. 방화문에 괴어둔 벽돌 5개는 두 손으로 들기도 버거웠다.

▲ 서울 강서구 방화동 아파트의 방화문. 닫히지 않게 벽돌과 책장을 놓았다.
▲ 서울 강서구 방화동 아파트의 방화문. 닫히지 않게 벽돌과 책장을 놓았다.

계단과 통로에는 빨래 건조대와 노인 전동차, 김치냉장고, 쇼핑 카트 등이 쌓여 있었다. ‘소방시설 설치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서는 피난시설, 방화구획 및 방화시설 주위에 물건을 쌓아 두거나 장애물을 설치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비상계단은 불이 났을 때 대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이곳에 쌓아 둔 물건은 화재 발생 시 대피를 방해한다. 특히 어두컴컴한 계단에 많은 사람이 동시에 몰리면 더 위험해진다.

▲ 통로에 놓아둔 물건 
▲ 통로에 놓아둔 물건 

주민 박해월 씨(73)는 “방화문 한쪽이라도 닫아놓으면 연기가 덜 빠져나갈 것 같아 한쪽만 열어뒀다”며 “여기엔 장애인과 노인이 많이 사니까 방화문을 닫아놓으면 아주 불편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 이상옥 씨(90)도 “방화문은 항상 열어둔다. 닫으면 휠체어 타고 드나들기 불편할 것”이라고 말했다.

옆 아파트 방화문 역시 유명무실해 보였다. 벽돌뿐만 아니라 고임목과 도어스토퍼를 이용해 모든 층의 방화문을 열어 놓았다. 관리사무소 직원은 “주민 60% 이상이 고령이라 방화문을 열고 나가기 힘들어 한쪽 문만 개방했다. 닫는 게 원칙이라서 3월부터는 닫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아파트. 2022년 3월 화재로 1명이 숨졌다. 기자가 봤더니 2개 동, 각 25개 층 방화문이 전부 열려 있었다. 생수병과 노인 보행 보조기, 벽돌이 무거운 방화문을 받치고 있었다.

경비원은 “준공한 지 오래돼서 자동화 시설이 없다. 방화문을 잠가놓으면 주민이 불편을 많이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관리사무소 직원은 “순찰하면서 늘 안전을 강조하지만 세대수가 워낙 많아 관리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입주민이 스스로 안전 규칙을 실천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아파트 방화문
▲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아파트 방화문

옆 아파트 방화문에는 ‘방화문을 고정해두면 처벌받을 수 있다’는 내용의 안내문이 있었다. 하지만 2개 동, 44개 층 가운데 9개 층 방화문만 제대로 닫혀 있었다. 소화기와 의자를 괴어둔 탓에 방화문을 닫으려 해도 꿈쩍도 안 했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 아파트. 지난해 12월 불이 났을 때, 방화문이 닫히지 않아 2명이 숨지고 30명이 다쳤다. 이 아파트 계단에도 자전거, 킥보드, 유아차 같은 물품이 있었다. 주민 유은옥 씨(60)는 “계단 운동을 할 때마다 불편하다고 느낀다”라고 말했다.

근처 아파트는 비상계단을 짐 보관 창고로 사용했다. 부피가 큰 운동 기구를 비롯해 킥보드, 재활용 쓰레기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1명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 곳도 있었다.

관리사무소는 “주민에게 개인 물건을 치워달라고 부탁해도 잘 안 치운다. 비상계단에 물건을 적치하는 행위에 대한 안전 의식이 아직 부족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주민 이경상 씨(72)는 “화재 교육을 한 번 실시하긴 했는데 개인 물건을 안 치운 세대가 아직 있다”라고 말했다. 서명화 씨(74) 역시 “아무래도 비상계단에 물건이 놓여있으면 불편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위험해 보인다”라고 말했다.

▲ 서울 도봉구 방학동 아파트
▲ 서울 도봉구 방학동 아파트

‘건축물의 피난·방화구조 등의 기준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방화문은 언제나 닫힌 상태를 유지하거나 화재로 인한 연기 또는 불꽃을 감지해 자동으로 닫히는 구조여야 한다.

소방청 국가화재정보시스템 통계에 따르면, 2023년 발생한 화재 인명 피해의 약 43%가 연기와 유독가스에 의한 질식 사고다. 질식에 의한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선 방화문을 닫힌 상태로 유지해, 화재가 발생해도 계단실로 연기가 유입되는 걸 막아야 한다.

우석대 김정훈 교수(소방방재학과)는 “방화문은 화재 발생 시 인적, 물적 피해를 최소화한다”며 “방화문을 열어서 고정해 두는 행위가 적발되면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 “노후 아파트는 드라이비트 공법으로 건축되는 경우가 많아 화재가 빠르게 번질 수 있으니 방화문 이용에 관한 기준을 더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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