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는 기억한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서울 48개 선거구 중 40곳을 차지했다. ‘뉴타운 공약’ 효과였다. 하지만 같은 해,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로 뉴타운 사업은 좌초됐다. 다음 19대 총선. 새누리당(구 한나라당)은 서울 지역구 16석을 얻는 데 그쳤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매니페스토본부) 이광재 사무총장은 한나라당 의원 다수가 공약을 이행하지 못해 수도권에서 낙선했다고 분석했다. 유권자가 국회의원 공약을 기억하고 평가했다는 얘기다.

매니페스토본부는 국내 최초로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의 공약을 전수조사한 단체다. 공약을 중심으로 선거를 치르고, 의원을 평가하기 위해 출발했다.

매니페스토(Manifesto)는 과거 잘못을 반성하고, 새로운 미래를 위한 약속을 문서로 선언함을 뜻한다. 매니페스토본부는 정책공약을 만드는 과정부터 실천하는 과정까지 시민 의사가 반영되는지 평가한다.

회사원 김은정 씨(28)는 공약을 보고 투표한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 때, 시립 도서관을 건설하겠다고 공약했던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지역구에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해서다. 공약을 보면 당선 후 정치인의 행보를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총선에서도 공약집을 읽어보고, 마음에 드는 공약을 내놓은 정치인을 뽑을 예정이다.

매니페스토본부는 김 씨 같은 유권자를 위해 의원의 공약 이행을 평가한다. 이 사무총장은 공약은 유권자와 의원 간의 계약서라고 말했다. “국회의원이 유권자와의 약속을 소중히 다뤘느냐를 보고 재신임할 건지 아니면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거다.”

매니페스토본부는 21대 국회의원의 공약 이행과 의정 활동 평가를 1월 31일 공개했다. 2023년 12월 말 기준으로 공약 완료율은 51.38%. 공약을 ▲ 완료 ▲ 추진 중 ▲ 보류 ▲ 폐기로 나눴다. 의원실에 질의서 공문을 보내 현황 내용을 직접 작성해달라고 12월 요청했다.

▲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의 국회의원 공약 분석 결과
▲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의 국회의원 공약 분석 결과

질의 대상은 선거 당시 공보물에 실었던 모든 공약. 입법 공약은 입법 명과 입법 현황을 기술해야 한다. 재정 공약의 경우, 이행을 위해 필요한 재정과 확보액, 집행액은 얼마나 되는지 근거를 제시하도록 했다.

이 사무총장은 채울 내용이 많다 보니 의원 보좌관들이 힘들어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국회의원이 세비를 받는 이유는 얼마나 일을 잘했는지 평가받기 위해서기도 하다. 의원 입장에선 선거 때 불이익이 있을까 봐 어떻게든 작성해서 공개한다.”

▲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가 국회의원실에 전달한 공약 관련 질의서(출처=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가 국회의원실에 전달한 공약 관련 질의서(출처=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의원 26명은 질의서에 회신하지 않았다. 매니페스토 본부는 이 명단을 따로 공개한다. 대부분은 지역구를 바꿨거나, 불출마한 경우다. 이 사무총장은 유력 정치인과 친분이 있어 당선되는 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의원도 답변서를 내지 않는다고 했다.

답변 내용은 매니페스토본부가 두 번에 걸쳐 평가한다. 평가 기준과 다르게 정리됐으면 의원에게 소명을 요청한다. 의원 225명이 보낸 답변서는 본부뿐만 아니라 전문가, 활동가가 함께 확인한다. 평가가 끝나면 답변 내용까지 시민에게 모두 공개한다.

의원이 공약 완료율을 높이기 위해 임기 내에 빨리 끝내기 쉬운 단기성 공약만 내놓는 건 아닐까. 매니페스토본부가 활동을 시작할 때, 학계에서도 우려했다. 이 사무총장은 아니라고 했다. 국회의원이 갈수록 더 장기성 공약을 내놓는다고 했다.

공약 완료율과 함께 공약 내용 분석도 공개한다. 분석 결과를 보면, 21대 국회의원 공약 중 지역개발 위주의 지역공약이 78.4%였다.

매니페스토본부는 유권자가 원하는 공약을 알리기 위해 ‘유권자 10대 의제’도 발표했다. 정치권에서 공약을 선택하지 말고, 유권자 목소리를 듣고 만들라는 의도다. 전문가 95명과 의제를 모아서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우선순위를 물었다. 전문가와 유권자가 모두 ‘고물가 고금리 대책 등 민생안정’를 1위 의제로 뽑았다.

공천이 끝나면 선거 공약에 집중할 예정이다. 정당이 추진하는 10대 핵심 공약과 재원 조달 방안 등을 질의해 분석한다. 후보자에게는 관심 있는 법안과 위원회 활동 등을 중점적으로 물어볼 계획이다.

이 사무총장은 매니페스토본부 활동이 시민 공론장의 기반이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프랑스는 선거철이 되면 선출직 후보자는 조용한데 선술집이 웅성웅성한다. 좋은 공약이 무엇인지 토론하는 장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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