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고니아에 바람이 분다. 강풍이 불 때는 몸을 낮추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파타고니아의 건물은 땅바닥까지 바짝 엎드렸다.

지난 한 해 견뎌내기 힘든 강풍과 마주했다. 인생에서 크고 작은 위기야 항시 오기 마련인가. 지나가는 바람의 의미를 어떻게 깨달을까.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국립공원에는 바람이 사시사철 분다. 지구상에서 제일 센 강풍이란다. 계절을 가리지 않는 편이다. 여름에 해당하는 1월과 2월에는 잠잠할 때도 있다. 관광객이 찾는 시기다.

▲ 한국인 등산객이 토레스 전망대를 오르는 모습
▲ 한국인 등산객이 토레스 전망대를 오르는 모습

이 초원의 지평선 너머에 타워의 삼각봉이 송곳니를 뒤집은 모양으로 우뚝 솟아있다. 남봉(d’Agostini)은 2248m, 중앙봉(Central)은 2800m, 북봉(Monzino)은 2530m이다. 이곳을 지척에서 바라볼 수 있는 토레스 전망대는 856m이다.

토레스는 영어로 타워란 뜻이다. 파이네는 원주민 언어로 파란색이다. 광야의 상징물이 푸른색 삼각봉이기에 파타고니아의 칠레 쪽 공원을 토레스 델 파이네라 작명했다.

공원 입구에 있는 티에라 파타고니아에 짐을 풀었다. 베이스캠프로 삼아 1월에 5박 6일의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숙박시설 앞, 푸른 하늘과 푸른 호수 너머에 토레스 삼각봉이 그림같이 서 있다. 절경이다.

롯지(lodge) 모습이 특이하다. 입구에서 보면 낮은 단층이다. 숙박시설 앞 사르미엔토 호수(Largo Sarmiento)에서 보면 2층형의 아치형 렌치(Ranch)이다. 미국 중서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워크아웃 베이스먼트(walkout basement) 형태다. 강풍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언덕에 바짝 기댔다. 제주 관광단지에도 최근 이렇게 특색있는 숙박시설이 들어선다.

▲ 티에라 파타고니아 롯지(출처=티에라 파타고니아)
▲ 티에라 파타고니아 롯지(출처=티에라 파타고니아)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조찬을 하고 산악 가이드인 호세 리부이의 안내를 따라 W 트레킹코스의 베이스를 통해 토레스 전망대를 향했다. 사시사철 부는 바람으로 잡초와 잡목이 나란히 옆으로 누었다. 코로나 발병 직전에 등산객의 담배꽁초가 산불로 번져서 여기저기 까맣게 탔다. 야생 잡풀이 누렇게 자란다. 서먹하다. 태고의 초원을 있는 그대로 보존할 수 없을까.

그렇더라도 파타고니아는 경의의 땅이다. 푸른 하늘, 푸른 호수, 푸른 빙하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35편에서 언급했듯이 한국인에게는 지구상 반대편에 있는 가장 먼 여행길이다.

개마고원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곳이 생각났다. 중국 쪽에서 두만강을 건너 양강도에 소재한 개마고원을 거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파타고니아의 광야는 제주도 영실코스를 따라 올라간 한라산 중턱 지대처럼 평탄하다.

토레스 델 파이네의 삼각봉을 바라보면서 남북 교류가 한창일 때 운이 좋게 세 번이나 다녀온 금강산을 상상해 본다. 개마고원을 거쳐 함경남도 장진호를 통과해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1638m)까지 걸어간다면 파타고니아를 트레킹하는 기분이 들까?

▲ 토레스 델 파이네의 삼각봉. 왼쪽부터 남봉 중앙봉 북봉(로버트 타렌티노 제공)
▲ 토레스 델 파이네의 삼각봉. 왼쪽부터 남봉 중앙봉 북봉(로버트 타렌티노 제공)

서울에서 워싱턴 DC를 거쳐 시애틀에서 모인 가족 여행단에 합류해 미국에서 가장 크다는 댈러스-포트위스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거기서 다시 칠레 수도인 산타아나에서 2박을 하고 목적지인 파타고니아에 도착했다. 신년 초였으나 남반부이기에 초여름에 해당하는 좋은 날씨다.

칠레의 최남단 공항인 푼타 아레나스 공항에 내렸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안내자가 기다려야 하는데 나오지 않았다. 뉴욕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1시간 남짓 지나서 우리를 태울 승합차가 나타났다. 푼타 아레나스에서 파타고니아의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까지는 4시간 넘게 걸린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대평야가 남태평양과 나란히 눈 앞에 펼쳐진다.

▲ 칠레 쪽 파타고니아 지도
▲ 칠레 쪽 파타고니아 지도

젊은 시절 미국의 서북부에서 또래의 백인 친구들과 LA를 거쳐 애리조나를 여행한 적이 있다. 피닉스 근처에서 트럭을 타고 선인장이 곳곳에 들어선 애리조나 들판을 누볐다. 태평양 연안을 따라 길게 늘어선 평야를 끝도 없이 달리니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는 착각에 빠진다. 여행은 하루라도 젊었을 때 해야 신나게 즐길 수 있는 모양이다.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은 W자 코스를 따른다. 오지 여행가라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버킷 리스트에 남으리라. (채경석, <천만 시간 라틴, 백만 시간 남미>, 살아있는 화석,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276쪽) 남미 땅끝마을에 간다면 ‘W자 트레일’을 거닐어라. 서울 둘레길 2.0처럼 서로 연결된다.

서울 둘레길 2.0은 기존의 8개 코스를 21개 코스로 세분화했다. 서울 둘레길도 다 돌아보지 못했으면서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W 트레킹’을 왜 먼저 했을까? 스스로 물어본다. W자 위 꼭지의 세 곳에 전망대가 있다. 여기서 타워의 삼각봉을 다 바라볼 수 있다.

토레스 지역은 남미대륙의 생성기에 바다였다고 한다. 그곳에 화산의 마그마가 올라오다가 분출되지 않은 채 굳어서 여기저기 타워가 생겼다. W 트랙의 오른쪽 첫 번째 전망대는 미라도르(Mirador) 토레스로 불린다.

전망대 입구인 라스 토레스에서 2시간 정도 걸어 오른다. 경사가 완만해 남산 정도의 등산코스다.중앙 전망대는 미라도르 브리타니코로 900m의 높이다. 파이네 그렌데(Paine Grande)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W 트레일의 왼쪽 꼭지점은 그레이(Grey)로 불린다. 이곳에까지 남미 최대의 파타고니아의 산 빙하가 내려온다.

트레킹을 할 때 발견한 토레스 델 파이네의 작은 가시나무에 열린 새까만 칼라페테(Calafate)를 따먹은 방문객은 다시 파타고니아로 돌아온다는 속설이 있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다시 갈 수 있을까.

 

 

*로마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전원시(Ecologae)>에서 따온 라틴어구 “Et in Arcadia ego”를 패러디해 제목을 달았다. 요한 볼프강 괴테, 박찬기 이봉무 주경순 옮김 <이탈리아 기행> 2023,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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