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르던 강아지가 죽고 마음이 헛헛해서 경마장에 오기 시작했어. 그게 벌써 4년이나 됐네.”

송이남 씨(73)는 매주 금·토·일요일마다 경기 과천시 ‘렛츠런파크 서울’ 경마장(과천 경마장)을 찾는다. 의지하던 강아지 뽀삐가 노환으로 죽은 뒤, 경마장이 유일한 낙(樂)이다.

그는 ‘늙은 사람들’이나 경마장에 취미를 들인다고 말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사행산업인 경마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자는 2023년 12월 23일 과천 경마장을 갔다.

이용객 대부분이 노인이었다. 휴대전화로 말 경기 이력을 검색하면서 마권 구매표에 컴퓨터 사인펜으로 표기하는 할아버지. 편의점에서 빵을 사서 자판기 커피와 먹으며 경기를 기다리는 할아버지.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는 할머니. 일부는 삼삼오오 모여 경기 이야기를 나눴다.

▲ 과천 경마장에서 노인들이 경기를 보고 있다.
▲ 과천 경마장에서 노인들이 경기를 보고 있다.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가 발표한 ‘2020 사행산업 이용실태조사’를 보면, 경마 마권을 구매했다는 응답은 50대가 45.8%, 60대 이상은 44.2%다. 40대 미만은 16.7%였다. 경마장을 찾는 연령대 대부분이 50대 이상이라는 뜻이다.

정희동 씨(63)는 경마에 취미를 붙인 지 20년째다. 경기가 있는 날마다 경마장에 간다. 이날 첫 경기는 오전 11시. 오전 10시 경마장에 도착해 입구에서 5000원짜리 경마장 전문지를 2개 샀다. 출전마의 경기 기록과 훈련 현황을 보고 어떤 말에 베팅할지 정한다.

이날 경기는 16회. 정 씨는 경마장에 갈 때마다 적어도 10만 원은 쓴다고 말했다. 스스로 ‘20년 차 베테랑’이라고 말했지만, 승률이 좋지는 않다.

“맨날 잃어. 근데 걸리면 대박이니까 오는 거지. 오면 하루 종일 경마도 보고, 사람들이랑 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

입장료 2000원을 내면 폐장 시간(오후 5시)까지 머물 수 있다. 정 씨는 추운 날이나 더운 날 실내에 눈치 보지 않고 머물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 2020 사행산업 이용실태조사(출처=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
▲ 2020 사행산업 이용실태조사(출처=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

경기 10분 전, 정 씨는 경기를 봐야 한다며 화면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첫 경기는 제주 경마장에서 진행됐다. 화면 앞의 할아버지는 황금색 돋보기로 전문지를 봤다. 전문지 판매소에서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노인을 위해 돋보기도 함께 판다.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리자 경마장 실내가 소란스러워졌다. “2! 4! 7!” 곳곳에서 베팅한 마번을 외쳤다. “따! 따! 따!” “5는 무조건 따고 보라잖아” 경기가 시작되면 모르는 사람과도 이야기를 나눈다.

2, 4, 7번 말이 선두로 달리자, 환호성과 욕설이 동시에 들렸다. “아이, 오늘 잘 되네!” “에이씨, 별게 다 xx. 운도 안 좋네.” “말을 x같이 타네, 6번이” 결승선이 보이자, 소리가 더 커졌다.

결승선은 5, 7, 1, 2, 4번 말 순으로 통과했다. 경기가 끝나자 화면 앞의 사람들이 흩어졌다. 어느 노인은 옆에 있던 사람과 경기를 평가했다.

지하철을 타고 왔다는 변진규 씨(59). 첫 경기에서 1, 2, 5번 말에 1000원을 걸었다. 첫 경기부터 돈을 잃었다며 멋쩍게 웃었다. 일이 없어 경마장을 찾던 변 씨에게 경마는 취미가 됐다.

“돈 있는 사람들은 골프를 치면서 취미생활 하지만, 나는 그런 걸 하기가 어려워요. 경마장에 와서 경기 보고, 마권 사는 게 취미가 됐어요.”

일부는 일확천금을 노린다. 나윤이 씨(70)는 남편과 함께 경마장을 다닌 지 25년이 넘었다. 부부는 매번 10만 원씩을 쓴다. 작년 5월 이후로 배당금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한 달에 200만 원 넘게 썼지만 한 번도 돈을 따지 못한 적도 있다. “계속 잃으니까 더 오게 되는 거야. 잃었던 걸 어떻게든 따야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나 씨는 기자가 구매한 경마 전문지를 들고 가서 읽기 시작했다. 말 ‘장군가람’의 정보를 보고 싶은데 자기가 샀던 전문지에는 원하는 정보가 없다고 했다. 전문지마다 정보가 달라 많이 사는 게 유리하다고 덧붙였다.

앙명선 씨(68)는 정부 지원금의 약 80%를 경마장에 쓴다. 매달 20일에 주거비 25만 원, 생계급여 29만 원을, 매달 25일에 기초연금 32만 원을 받는다. 월세 25만 원을 내고 나면 63만 원이 남는데, 경마장에 50만 원 정도를 쓴다.

양 씨는 ‘혹시 대박 날까 봐’ 경마를 한다고 말했다. 경기가 없는 날엔 사람들을 만나 술을 마신다. 일을 그만두고 할 일이 없어서 경마를 하거나,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낸다.

“인생에 재미도 없는데 경마장 오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있으니까 자꾸 오게 되지. 맛있는 밥 사 먹는 것보다 경마장에서 돈 쓰고 즐거운 게 더 좋아.”

다음 경기가 시작되자 화면 앞에 노인이 몰렸다. 71명이 화면 주변에서 경기에 집중했다. 이 중에서 65명이 남자 노인이었다.

이강일 씨(67)는 뒷짐을 쥐고 경기를 지켜봤다. 제주도에 사는데, 출장 때문에 서울에 왔다가 경마장에 들렀다. 그는 경마장에서 얘기를 나눠보면 가난한 노인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막일하거나 택시 운전하는 가난한 노인네들이 ‘어떻게 따볼까’하는 마음으로 온다고. 어떻게 보면 노름이잖아, 이게.”

이들은 기자에게 같은 말을 했다. “젊은 사람이 벌써 경마에 빠지면 안 돼. 우리야 할 일도 없고 늙어서 경마하는 거지.” “나는 미래가 없어서 그냥 경마에 돈 거는 거야. 여기 오면 집구석 망해.” “우리처럼 늙은 사람이나 오는 거지, 다시는 여기 발 들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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