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25개 자치구 가운데 21개 구는 이태원 참사 재발을 막겠다며 인파 시뮬레이션을 했다. 다중인파 밀집지역 안전사고를 예방하라며 서울시가 보낸 특별조정교부금 13억2700만 원이 들어갔다.

인파 시뮬레이션은 지형 특성과 보행량을 고려해 위험 구간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이다. 어디가 압사 등 사고 위험이 많은지 특정할 수 있고, 어떤 예방 조치가 필요한지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스토리오브서울 취재팀이 정보공개청구 등으로 확인했더니 인파 시뮬레이션 용역이 끝나기 전에 도로나 도로시설물 정비 등 보행환경개선사업을 마무리한 곳이 7개 구였다. 다른 11개 구는 공사 진행 중에 분석 보고서를 받았다. 위험 구간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전에 사업 대상을 임의로 사업지를 정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자치구 25곳의 보행환경개선사업 총액은 166억 원. 그러나 상당수는 압사 등 인파사고와 거리가 먼 장소에서 사업을 했다.

취재진이 파악한 20개 자치구의 보행환경개선공사 사업 장소 178곳 중 45곳이 주택가였다. 비교적 유동 인구가 많은 상업지구에서도 사람이 몰릴 만한 장소가 아닌 곳에서 공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대문구는 이화여대 인근 도로에 아스팔트를 새로 깔았다. 현장 취재 결과, 코로나19로 일대 상권이 죽으면서 신축 오피스텔이 많이 들어서 준주거지구로 바뀌는 중이었다.

은평구는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 인근 차도에 미끄럼방지 포장을 했다. 경사가 없는 평지인 데다 인파가 몰리면 위험하다는 좁은 골목과도 떨어졌다.

▲ 서대문구가 정비한 신축 오피스텔 앞 도로(왼쪽)와 은평구가 새로 포장한 연신내역 인근 차도
▲ 서대문구가 정비한 신축 오피스텔 앞 도로(왼쪽)와 은평구가 새로 포장한 연신내역 인근 차도

영등포구는 4월부터 9월까지 보행환경개선 공사를 벌였다. 그런데 첫 삽을 뜨고 6개월이 지난 10월에야 ‘인파 시뮬레이션’ 용역을 발주했다. 용역은 12월 말 끝날 예정이다.

영등포구의 인파 연구용역을 총괄한 김영욱 한국스페이스신택스 연구소장(세종대 건축학과 교수)은 11월 8일 “(영등포구 용역은) 위험 지점을 찾아내는 것까지만 진행이 됐고,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아) 우리가 준 걸로 (사업지를 선정)한 건 아닌 것 같다”라고 말했다.

영등포구청이 공개한 보행환경개선 사업지를 확인해보니 21곳 중 13곳이 인파 사고와 거리가 먼 주택가였다. 이 중 9곳은 주택가의 어린이보호구역 차도에 미끄럼방지 목적으로 붉은색 포장재를 깐 경우였다.

통행량이 적고, 인도가 아닌 차도에서 사고 예방사업을 했다는 얘기. 영등포구청 담당자는 “정확하게 다중 밀집 지역만 하는 게 아니라 안전이 필요한 데 위주로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사람이 몰리지 않는 장소도 사업대상에 들어갔다. 영등포구가 받은 특별조정교부금은 13억7000만 원. 인파 시뮬레이션에는 그중 약 1억 956만 원을 썼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던 용산구는 인파 시뮬레이션과 상관없이 올 초 현장 조사를 통해 사업 대상을 정했다. 시뮬레이션 용역은 6월 9일 시작했지만, 공사는 5월 22일부터 시작했다.

11월 7일을 기준으로 23곳 중 21곳에서 공사가 끝났다. 9곳은 주민만 다니는 주택가였다. 중간에 바뀐 1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올 초 현장 조사를 통해 사업 대상으로 정했다. 인파 시뮬레이션 결과를 활용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용산구청 도로과는 “특정 지역 어디에 (사람이) 몰릴지를 저희가 정확하게 예측하기는 사실 좀 불가능하지 않나”라며 “그래서 노후화되거나 파손된 도로시설물을 정비했다”라고 설명했다.

위험 구간이 특정되는 인파 시뮬레이션을 진행했지만, 보행환경개선사업 대상으로 정하는데 활용하지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용산구는 시뮬레이션에 5000만 원, 도로 포장 등 보행환경개선사업에 8억 3100만 원을 사용했다.

▲ 영등포구가 버드나루로 23길 차도에 미끄럼방지 포장을 했다(왼쪽). 용산구가 정비할 이태원동 15-119 계단도 노후 주택가에 있다.
▲ 영등포구가 버드나루로 23길 차도에 미끄럼방지 포장을 했다(왼쪽). 용산구가 정비할 이태원동 15-119 계단도 노후 주택가에 있다.

영등포구와 용산구를 포함해 13개 구의 연구용역을 맡은 한국스페이스신택스 연구소의 김 소장은 “골목마다 어떤 가게가 몇 개나 있는지, 길의 폭이 지도와 다르지는 않은지 실제로 현장에서 관찰하고, 관찰한 데이터로 여러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위험 구간을) 예측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서 김 소장은 “결과 보고서에는 ‘도로 어디가 위험하니까 포장을 다시 하세요’, ‘자전거 거치대를 정비하세요’ 같은 게 다 나와 있다”고 했다. 위험 구간을 과학적으로 특정할 수 있고,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어떤 조치가 필요한지까지 나와 있다는 얘기.

인파 시뮬레이션을 했던 21개 자치구 중 이런 제언을 도로·시설물 정비에 적극 반영하겠다고 밝힌 구는 3곳뿐이었다. 성동구는 보수가 시급한 일부 장소를 제외하고는 인파 시뮬레이션 보고서를 토대로 보행환경개선공사를 하겠다고 했다.

성동구청 안전관리과 담당자는 “(예산을) 한두 푼 쓰는 것도 아니고 (시뮬레이션 결과를 활용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시뮬레이션을 하니 생각보다 왕십리역 주변의 위험도가 떨어져 (보행환경개선) 사업은 주로 성수동 카페거리 일대에서 진행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보수가 시급한 일부 장소는 결과 보고서가 나오기 전에 공사했다고 말했다.

도봉구청 도로과는 “(인파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라서 보수가 필요한 곳에 보수를 할 것”이라며 아직 사업 장소가 특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동작구는 노량진 일대에서 도로를 정비할 계획이었지만, 분석 결과를 보고 계획을 바꿨다. 동작구청 도로안전과는 “인파 시뮬레이션 결과 특별히 보행 환경을 개선할 위치나 특별 사항이 나오지 않았다”라며 분석 보고서는 폐쇄회로(CC)TV 관제 시스템 구축에 활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일부 자치구는 '선공사 후분석'에 문제가 없다고 했다. 시뮬레이션 보고서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자치구 재량이기 때문이다. 영등포구청 도시안전과는 “(인파 시뮬레이션 결과는) CCTV 쪽에 활용할 계획이고, 안전 관리에 필요한 로고젝터나 표지판도 설치할 예정”이라고 했다.

11월 중 인파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오는 은평구청은 “매년 봄에 진행되는 행사(불광천 벚꽃축제)에서 활용하려고 한다”고 했다. 은평구는 지난 7월 미끄럼방지 포장과 LED 표지병 등의 정비를 모두 끝냈다.

오영민 동국대 교수(행정학과)는 “(보수가) 시급하거나 사고가 예상되는 경우라면 빨리 조치를 취해야겠지만, 급하지 않은 곳에 예산을 그렇게 편성했다면 부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위험도를 따져 필요한 곳에만 예산을 써야 한다는 뜻이다.

공하성 우석대 교수(소방방재학과)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공사를 진행했다면 시급성도 자의적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시뮬레이션(결과)이나 어떤 정확한 근거, 데이터를 가지고 예산을 투여해서 유지보수라든가 보강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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