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너무 심하게 때리니까 거실에 있는 엄마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친 적이 있어요, 그때 엄마가 저를 방관한 게 너무 상처였죠. 학대가 점점 심해지니 이대로는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예은 씨(25)는 9년 전 집을 나왔다. 당시 16살이었다. 가정폭력이 원인이었다. 부모가 이혼하고 오빠가 생계를 책임지면서 김 씨에게 훈계하며 폭력과 폭언을 행사했다.

집을 떠나 혼자 자취하기로 어머니와 합의하고 모든 경제적 책임은 김 씨의 몫이었다. 평일에는 학교에 가고 주말에는 아르바이트했다. 가족과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했으나 누구도 김 씨가 겪은 일에 책임 의식을 갖지 않았다.

심지어 오빠는 자기 말과 행동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김 씨는 “내가 살갑지 않은 딸이라 이렇게 됐나 자책도 했지만, 지금은 이제야 원래 내 것이던 삶을 되찾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생존을 위해 탈출

계획을 통해 하는 독립과 달리 긴급 상황에서 가정을 떠나 홀로 살아가는 청년이 있다. 가정 내 폭력이나 불화, 성폭력, 경제적 착취로 단절을 선택한 ‘탈가정 청년’이다. 전문가들은 전국적으로 2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공식 통계는 아직 없다.

탈가정 청년은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가 제시한 개념이다. ‘청년정책 사각지대 발굴을 위한 ‘탈가정 청년 실태조사 연구 보고서’(2021년)는 “가정 밖 청소년에게 해당하는 상태가 청년기에 적용된다면 해당 상황의 청년에게 탈가정 청년이라는 범주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가정 밖 청소년은 가정의 보살핌 부족이나 학대, 가정폭력 등 가정으로 복귀해 생활하기 어려운 사유로 가정 밖에서 생활하는 청소년(청소년기본법상 청소년‧9~24세)이다. 보고서는 ‘가정 밖 청소년이 청년이 된 상황’, ‘청년 연령대가 돼 가정폭력과 불화 등으로 인해 탈가정한 경우’가 탈가정 청년(청년기본법상 청년‧19~34세)에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탈가정 청년을 지원하는 예비 사회적 기업 ‘282북스’의 강미선 대표는 탈가정 청년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가정에서 받은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생계유지와 학업을 병행하니 우울증이 깊어지기 때문이다.

강 대표는 “번아웃이 와서 은둔생활을 하는 친구에게 탈가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고립·은둔 청년 지원 기관 직원이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조언한 일도 있다”며 “찾아올 사람이 없으니 고독사 위험도 높다”고 말했다.

▲ 탈가정 이유
▲ 탈가정 이유

원가정과 단절한 주된 이유는 가정 학대다. 282북스가 지난해 60명을 조사한 결과 원가정을 떠난 이유로 ‘정서적 학대’가 91.2%로 가장 많았다. 다음은 가정폭력(59.6%), 방임(36.8%), 아웃팅(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성정체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7%) 등의 순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집을 나온 한대윤 씨(29)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부모가 이혼하고 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나 정서적, 경제적으로 전혀 보호받지 못했다. 폭언도 있었다. 누나와 동생은 먼저 집을 떠났다.

탈가정하기 직전에 가족을 모두 불러 얘기를 나눴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한 씨는 “그렇게 미련 없이 집을 나왔다. 1년 정도 지난 뒤 ‘나도 좋은 아빠가 아니지만 너도 좋은 아들 아니다’라는 아버지의 문자가 왔다 온 적 있다”라고 말했다.

2년 전에 탈가정했던 A 씨(23)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폭언과 폭력에 시달렸다. 성인이 되고도 어머니는 이성 관계, 외출 등 일상을 통제하려 했다. “엄마의 학대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우울했다. 집을 나온 후 약을 먹고 상담도 받았는데 나아지지 않고 의지하거나 물어볼 만한 어른이 없어 너무 외로웠다.”

 

자립 후 직면한 어려움

탈가정 청년은 대개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집을 나오니까 지낼 공간이 마땅치 않다. 이용할 시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법률상 청소년이 아닌 25세 이상 탈가정 청년은 보호 쉼터 등 청소년 시기에 지원받는 제도에서 제외된다. 청소년 쉼터도 19세 미만이 입소 대상이다.

실제로 서울 내 중단기 청소년 쉼터 홈페이지를 살펴본 결과 12곳 중 2곳은 19세 미만이어야 입소 가능했으며 6곳은 19세 미만의 청소년이 우선 보호 대상이었다. 부모에게 사는 곳이 알려질까 봐 주소지 신고를 하지 않은 채 지내는 이들도 있다.

▲ 탈가정하고 가장 어려웠던 점
▲ 탈가정하고 가장 어려웠던 점

가족 도움 없이 생계를 혼자 꾸리다 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운 점이 특히 문제. 282북스 설문조사에서도 탈가정을 선택하고 경제적 어려움(74.6%)을 가장 많이 꼽았다.

한대윤 씨는 인천에 살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고 6년 동안 한 번도 주소지를 신고하지 않았다. 원가족과 연결고리가 생길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난민이 공항에서 생활하듯이 살았다. 공용 샤워 시설에서 씻고 사물함에 짐을 보관하고 과방에서 자며 지냈다.”

그는 일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19살 때는 택배 상하차 등 인적 사항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일당 받는 일을 주로 했다. 20살이 된 이후로는 공장을 다니거나 국가 근로를 하는 등 생활비를 벌기 위해 끊임없이 일했다.

경제적 한계에 몰리면서 정서적으로도 힘든 상황이다. 기자가 만난 3명 모두 우울증과 무기력으로 인한 고립·은둔을 경험했다. 282북스 설문조사 결과 탈가정하고 힘든 점이 심리적/정서적 불안이라고 18.2%가 대답했다.

정신과에서 자살 위험도가 높다는 진단 결과를 들었다는 김예은 씨는 “우울증이 굉장히 심할 때는 일을 잘 못해서 생활비 때문에 빚을 졌다. 지금은 채무 조정을 받는 중”이라고 했다.

▲ 탈가정 청년의 토크 콘서트에서 한대윤 씨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282북스 제공)
▲ 탈가정 청년의 토크 콘서트에서 한대윤 씨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282북스 제공)

 

복지 사각지대 속 소외되는 청년들

정서적 경제적으로 힘들지만 정부 정책은 많지 않다. 기본적으로 청년을 자립 능력이 있는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282북스 설문조사에서 청년 관련 지원 사업을 받지 못했다는 대답이 65.4%나 됐다.

자발적으로 가정을 나온 탈가정 청년은 지원받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가족 전체를 수급 대상으로 묶어서 선정하는 ‘가구 단위 복지 제도’ 때문이다. 부모의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하고 소득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니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셈이다.

탈가정 청년은 기초생활수급자 신청도 어렵다. 현행법상 만 30세 미만은 결혼해야 세대 분리가 가능하다. 미혼 청년은 단독 가구여야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신청을 할 수 있다.

30세 미만이 단독 가구로 분리되려면 중위소득 40% 이상의 수익이 있어야 하므로 탈가정 청년에겐 어렵다. 가정폭력 피해자라면 부모의 입건 이력이 있을 경우 신청이 가능하지만 조건과 과정이 까다롭다. 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피해자 스스로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LH 주거 지원이나 청년 전세 임대 역시 부모 소득이 지원 기준이다. LH의 청년 주거급여는 부모와 따로 거주하는 20대 미혼 자녀에게 부모와 별도로 주거급여를 지급하지만 원가족이 기존 주거급여 수급자가 아니면 청년 주거급여 분리 지급을 신청하지 못한다. 청년 전세 임대도 본인과 부모를 의미하는 가구 소득이 선별 기준이다.

우울증이 심해 일을 하지 못하자 의료급여 수급을 신청하러 간 김예은 씨도 부모의 소득 때문에 부양의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신청을 포기했다. 부양의무 기준은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과 재산이 있는 부모, 자녀, 배우자가 있으면 기초생활보장 대상에서 제외하는 제도다.

A 씨는 가정폭력 피해자임을 입증해 긴급복지지원을 받으려 했지만 “왜 집을 나오고 한참 뒤에 왔느냐. 상담 증명서가 진짜가 맞느냐”는 얘기를 들었다. 결국 긴급복지지원은 받지 못했다.

강미선 대표는 “가정폭력 증거를 내려면 상담 기록이나 경찰신고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탈가정 청년들은 갖추기 힘들다”라며 “어렸을 때 폭력을 신고했어도 처리 과정에서 보호받지 못한 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동국대 윤여원 교수(사회복지학과)는 “조사 결과를 보면 많은 가정폭력 피해자는 경찰신고를 하지 않는다. 도움을 요청할 곳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피해 사실이 공론화돼 더 큰 피해를 경험할 상황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강미선 대표는 탈가정 청년을 위한 정책을 새로 만들기보다는 현재 복지에서 소외되는 이들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자립준비청년 범주를 넓히는 걸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윤여원 교수도 “청년기본법이 정한 만19~34세 청년이 수혜자가 되도록 기존 정책의 제약을 검토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라며 “원가족 가구 소득을 기준으로 하는 지원정책을 검토하고 대상자 판결기준을 확장하거나 선별 기준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라고 덧붙였다.

자립지원필요청년의 범위를 확충하자는 지적은 8월 말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 세미나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 위원회 산하 ‘자립준비청년과 함께 서기 특별위원회’(특위)는 가정의 보호를 6개월 이상 벗어난 청년은 지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발표했다.

특위는 “중장기적으로 서로 다른 이름의 청년을 포괄하도록 자립지원필요청년의 범위를 진단해 지원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시설별 보호 이력을 합산해 6개월 이상 가정 외 보호를 경험한 이력이 기준이기에 시설 보호 이력이 없는 탈가정 청년은 포함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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