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동구는 둔촌2동 614-3 앞 계단을 8월에 고쳤다. 상업지역이나 유흥지역이 아니고 개발제한구역 인근 주택가라 조용했다.

계단 앞에서 7~8년 동안 행상을 했다는 유희길 씨(61)는 주말과 평일 모두 오가는 발길이 아주 적다고 했다. “계단이 가팔라 행인이 차도로 다니지, 계단으로 다니지 않는다. 공사를 잘못했다.”

동네 주민(60대 남성)은 다중 인파사고 재발을 막기 위한 서울시 특별조정교부금으로 계단을 고쳤다는 말을 듣고 혀를 찼다. “이태원(참사)하고는 전혀 관계가 안되지(없지). 여기 사람이 보여? 안보이지. 여기(이 주택가가) 몇 가구나 된다고….” 주민 김진성 씨(24)는 “계단이 오래돼서 정비가 필요했지, 다중인파 사고를 막으려고 한 건 아닌 것 같다”라고 말했다.

▲ 서울 강동구가 고친 주택가 계단
▲ 서울 강동구가 고친 주택가 계단

종로구는 광화문 중앙지하차도 양옆의 방음판을 6월에 교체했다. 길이 80m, 높이 2m, 두께 8㎜. 차량 소음이 차도 양옆 보행 통로로 전해지는 것을 막는 시설이다.

이 차도는 차량만 지나다닌다. 지상의 광화문광장에서 보행 통로로 이어지는 출입구가 없어 일반인은 다닐 수 없다. 원래 출입구가 있었지만, 광화문광장을 만들면서 폐쇄했다.

종로구청 도로과는 “지나다니는 차가 많은데 사고가 나면 불이 번질 확률이 높아서 가연성 소재였던 방음판을 강화 유리로 바꿨다”라고 설명했다. 불이 나면 지하차도 위 광화문광장을 찾는 행인에게도 위험하다는 얘기.

그러나 우석대 공하성 교수(소방방재학과)는 “이런 공사는 화재위험감소와 관련되지 (이태원 참사와 같은) 다중 압사(사고)와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시아안전교육진흥원의 최희천 연구소장은 “광화문 지하차도에 다중인파가 들어갈 일이 없겠지만,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지면 위쪽 광장은 정말 인파로 꽉 찰 테니까, 그 전에 조치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 서울 종로구가 교체한 방음판(종로구청 제공)
▲ 서울 종로구가 교체한 방음판(종로구청 제공)

용산구는 이태원로 222에서부터 이태원로36길 19사이와 대사관로5길에서 42길 사이 도로의 과속방지턱 4개를 개량했다. 두 구간 모두 이태원에서 한남동으로 내려가는 사면에 있다. 용산구는 “과속방지턱이 볼록하게 올라와 있으니까 행인이 지나다가 넘어지지 않도록 했다”라고 설명했다.

주민들은 ‘돈 낭비’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태원에서 15년간 세탁소를 운영했다는 윤유태 씨(69)는 “이 골목에 이게 뭐가 필요하냐. 돈만 낭비다”라고 말했다. 보광동 토박이라는 김영철 씨(58)는 “(과속방지턱은 차량) 속도를 줄이라고 만들어 놓은 거지 않냐. 인파 사고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금오공대 박준영 교수(기계설계공학과)는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박 교수는 인파 사고 예방에서 도로 구조가 가장 중요하다며, 인파가 몰리는 곳을 분석하고 구조를 변경하면 효과가 있지만 단순 도로포장은 사고 예방 효과가 없다고 지적했다.

▲ 서울 용산구가 고친 과속방지턱의 전후 모습
▲ 서울 용산구가 고친 과속방지턱의 전후 모습

서울시는 이태원 참사 48일 뒤인 지난해 12월 16일, 특별조정교부금 311억 3200만 원을 25개 자치구에 보냈다. 특별조정교부금은 광역시도가 시군구를 지원하는 예산. 서울시는 2월 자치구에 보낸 공문에서 교부금 용도를 ‘다중인파 밀집지역 안전사고 예방’으로 정하고, 신속하게 집행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취재팀이 정보공개청구로 파악한 결과, 166억 원이 도로나 도로시설물 정비에 쓰였다. 그중에서 9월 초를 기준으로 확정된 사업 장소 4분의 1은 인파 사고와 거리가 멀었다. 178곳 중 45곳이 주택가. 발길이 적고,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릴 행사가 열리지 않는 곳이다.

서대문구는 연세로2라길 35~37-19구간 주택가 경사로에 아스팔트를 새로 깔았다. 성북구는 보문로34다길 주택가 도로의 아스팔트를 새로 깔고 계단을 정비했다. 계단은 사람 1명이 지나갈 너비로, 중간부터 절반으로 좁아지는 데다 전봇대가 튀어나와 통행에 불편하다.

영등포구는 대림로39길 신영초등학교 인근 어린이보호구역 차도에 미끄럼방지 포장을 했다. 인도가 아닌 어린이보호구역 차도에 붉은 포장재만 덮은 사례가 영등포구에만 7곳이 더 있다. 양천구가 교부금으로 시행한 보행환경개선사업 장소 10곳 중 9곳이 노후 주택가였다.

▲ 서울시가 25개 자치구에 보낸 공문(출처=서울정보소통광장)
▲ 서울시가 25개 자치구에 보낸 공문(출처=서울정보소통광장)

박준영 교수는 “일반 주택가에도 이태원 참사 때처럼 인파가 많이 몰리면 상당히 위험해지겠지만, 이런 도로가 전국에 한두 개도 아니고 모두 개선할 수는 없다. 눈으로 보기에도 사람이 안 다니는 곳에 하면 조금 부적절해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서울시 자치구의 재원조정에 관한 조례 11조는 특별조정교부금 용도를 3가지로 정했다. 첫째, 재해로 인한 특별한 재정수요가 있는데도 예비비를 포함한 해당 자치구의 재원으로 충당할 수 없는 경우.

둘째, 자치구 청사나 공공시설의 신설‧복구‧보수 등의 사유로 인한 특별한 재정수요가 있어 시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셋째, 그 밖에 특별한 재정수입의 감소가 있거나 특별한 재정수요가 있어 시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다.

서울시가 지난해 자치구에 보낸 특별조정교부금은 이 중 첫 번째, 재해(이태원 참사)로 인한 특별한 재정수요로 인한 경우에 해당한다. 중앙대 홍준현 교수(공공인재학부)는 “일반교부금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 곳에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 서울 자치구가 보수한 장소들. 왼쪽부터 연세로2라길 경사로, 보문로34다길 오르막길과 계단, 신영초 앞 차도, 양천구 목동중앙서로7다길 주택가 계단
▲ 서울 자치구가 보수한 장소들. 왼쪽부터 연세로2라길 경사로, 보문로34다길 오르막길과 계단, 신영초 앞 차도, 양천구 목동중앙서로7다길 주택가 계단

오영민 동국대 교수(행정학과)는 “예산을 이런 식으로 쓰면 더 필요한 곳에 쓸 수 없는 일이 생기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있고, 충분히 문제 제기할 수 있는 예산인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김정부 경희대 교수(행정학과)는 “서울시가 교부금을 일반적으로 도로 환경 개선이나 도로의 보도블럭이 파인 걸 고친다든가 하는 용도로 쓰라고 했다고는 볼 수 없다. 사후관리가 잘 되지 않아 생기는 문제 같다”라고 지적했다. 취지대로 사용되지 않아도 환수 조치 등 서울시의 관리·감독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생긴 것 같다는 말이다.

공공재정 혁신방안을 연구한 민간연구단체 나라살림연구소의 손종필 수석연구위원은 “임의적으로 이렇게 사용하기 시작하면 원래 지원하는 취지가 없어진다”라며 서울시가 시정 조치를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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