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학생>

▲ 김진해 교수가 강의하는 모습
▲ 김진해 교수가 강의하는 모습

“김세연(가명)”
“응.”
“박철수(가명)”
“왜.”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순간은 수업 이후까지 계속됐다.

“진해! 내가 이해한 게 정확한지 모르겠어서.”
“어~ 아마 정확하지 않을 거야. 말해봐.”

여기서 ‘진해’는 교수, ‘진해’를 부르는 자는 학생이다.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경희대 청운관 620호 강의실에선 교수에게 존댓말을 해야 한다는 불문율이 깨진다. 경희대 <의미의 탄생:언어> 수업의 교수와 학생은 농담도 반말도 주고받는 관계다. 고작 2번의 수업을 청강했음에도 수업 형식의 독특함이 사람 간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걸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수업이 말의 변화를 통해 편한 관계를 추구한 것은 어느덧 1년이 넘었다. 김진해(54,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교수와 학생, 선배와 후배 간의 불필요한 군기를 없애기 위해 2022년도 2학기부터 일부 수업에서 ‘평어’를 사용해왔다. 평어는 반말이나 존댓말처럼 나이에 따라 위계를 나누지 않고 서로 동등한 관계에서 말을 편하게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는 구분에 익숙해져 있다. 사람을 만나면 나이를 먼저 묻고, 존댓말을 할지 반말을 할지 결정한다. 사회 곳곳에 있는 불평등 관계는 이러한 언어의 구분으로 강화되기도 한다. 나와 남, 개인과 사회, 이기심과 이타심. 나와 상대방 사이의 선을 긋는 구분들은 세상에 산재해있다. 김 교수는 구분하는 습관들이 일상에 녹아들어 ‘나’라는 존재를 틀 안에 가둔다고 말한다. 학생들이 교양수업에서 틀을 깨는 법을 배우고, 타인에 대해서 허용하는 법을 배워야 서로가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겠냐고 덧붙였다. 그 시작을 언어의 변화를 통해 추구하고 싶었다고.

7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다란 탁자 20개, 75명 정원의 중대형 강의이지만 조별토의 위주의 수업과 평어 사용은 수업의 의사소통 횟수를 늘렸다. 자발적으로 질문하는 예닐곱 명의 학생 외에도 발표자로 지목된 학생들은 평어로 당당하게 대답했다. 물론 잡담도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첫 만남에도 1학년 남학생은 3학년 여학생에게 자연스레 ‘누나’라고 불렀다. 일단 친해지고 있으라는 교수의 말에 벌써 서로를 놀리는 모습도 보였다. 프리미어리그 지난 시즌 우승팀 ‘맨시티’의 유니폼을 입고 본인을 내향형이라고 주장하는 학생은 지난 7월 맨시티의 내한 경기 이야기를 하며 외향적 면모를 뽐내기도 했다.

 

<어쩌면 한국적이지 않은 정서>

▲ 김진해 교수가 수업 참여를 독려하는 모습
▲ 김진해 교수가 수업 참여를 독려하는 모습

예를 중시하는 한국에서 직위나 나이에 관계없이 서로 말을 편하게 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수업을 처음 시작하게 됐을 때도 한겨레, SBS 등 여러 언론사에서 수업을 조명하기도 했다. 경희대 학생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나있었다. 실제로 이번 학기 수업을 듣고 있는 이영회(23학번,정치외교학)씨는 유튜브에서 본 교수님이라 흥미로워서 수강신청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마은수(23학번,아동가족학)씨도 너무 재밌고 유명한 수업이라는 소문을 들어 기대를 안고 첫 수업에 임했다고 한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김 교수는 왜, 어떤 이유로 시도했을까. 김 교수는 오히려 작가 이성민(56)씨의 책 ‘말 놓을 용기’를 보고 누군가 평어 사용을 시도하고 있구나, 따라 하는 건 어렵지 않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시도하는 사람이 많이 없다는 두려움보다, 1명이라도 먼저 시도한 사람이 있다는 응원에 더욱 힘을 얻는 사람이었다.

무작정 모든 수업에서 평어를 사용하는 건 아니다. 김 교수는 ‘의미의 탄생:언어’ 수업에서 처음으로 평어 사용을 시도한 이후 기준을 정립해왔다.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수업인지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200명 이상의 대형 강의는 학생들과 쌍방향 소통이 어렵다 보니 평어 사용을 하게 되면 교수가 일방적으로 반말을 사용하듯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교수와 학생 간의 대화도 가능하고 토론 위주의 수업이 가능한 경우에만 평어를 도입하게 됐다.

 

<평어로 틀을 깨고, 우리는 친구가 된다>

김 교수는 수업 밖에서도 평어를 쭉 사용하는 걸 선호한다. ‘평어’가 중요하기보다, 수업을 계기로 많은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구분을 넘어가길 바라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김 교수와 함께 교정을 나서는 순간, 저 멀리 구분의 벽을 넘어선 학생이 보였다. 경희대 학생으로 보이는 20대 초반 여성이 멀리서 “진해!”라고 부르며 다가왔다. 20대 여성이 50대 남성에게, 학생이 교수에게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며 다가와서 평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신기하지만 이상하지 않았다.

교수에게 존댓말을 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둘의 대화에 존중과 애정이 깃들어서인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형태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방학 동안 무얼 했는지, 밥은 먹었는지, 취업 준비는 잘 되고 있는지 등 단지 대화 내용에 집중하게 됐다. 어쩌면 반말과 존댓말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은 특별한 이유 없이, 단지 익숙해진 습관일 수도 있다. 존중의 의미는 대화의 ‘내용’에 담겨 있었다.

김 교수도 그동안 존댓말이 습관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이다. 평어를 사용하는 수업에서 실수로 30분 정도 존댓말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진해. 너 지금 존댓말 쓰고 있는 거 알아?” 라는 한 학생의 지적에 깜짝 놀라 다시 평어로 돌아왔다고. 학생들이 좀 더 자유로운 세상에서 더 많은 대화를 하고, 그 대화 속에서 자신을 찾아갔으면 좋겠다는 김 교수. 그런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김 교수 스스로도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김 교수의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해당 수업을 듣는 이하영(21학번,경영학과)씨는 수강 신청에서 우연히 수업을 듣게 됐다. 처음엔 마냥 재밌고 웃긴 수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수업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교수님 말씀을 들으니 수업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교수의 말을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두고 고이 간직했다.

▲ 이하영 학생의 핸드폰 메모장
▲ 이하영 학생의 핸드폰 메모장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 사이가 언어 하나 때문에 한정되는 것이 불행하다.”

이 수업의 진정한 목적은 대화였다. 언어로 인해 대화의 폭이 좁아지고, 서로를 알아갈 기회를 잃는 현실을 깨고자 했다. 김 교수는 대화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함께 나누는 대화 속에서 나 자신을 알아가며 앞으로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생각해보길 바랐다. 그 시도를 언어라는 고정관념을 깨며 시작했듯, 앞으로 학생들의 경험을 제한하는 요소들을 깨며 앞으로 나아가길 응원했다.

수업 외에 20대 초반에 겪을 수 있는 수많은 경험도 존중했다. 학칙이 규정하는 최소 출석 횟수만 채운다면 결석해도 감점하지 않았다. 학생은 무조건 학교를 우선시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갖게 되는 자신과의 대화 시간을 존중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며 대화가 점점 사라져가는 아쉬움을 느낀다. 타인과의 대화에서 결국 내가 누군지를 알아가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고민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전개된다. 하지만 질문이 줄어들고, 혼자가 좋아지고, 여러 가지 어수선한 일들로 사람이 무서워진 세상이다. 그럼에도 작은 변화가 대화의 즐거움을 다시 찾아주기도 한다.

취재를 위해 방문했던 ‘의미의 탄생:언어’ 수업에서도 파릇파릇한 대학생 친구들과 평어로 대화하며 새로운 친구를 만들었다. ‘평어’라는 매개체는 갑자기 수업에 찾아와 고작 2번의 수업을 함께 들은 이방인마저도 자연스레 어울리게 해주었다. 어쩌면 이렇게 작은 수업에서 만드는 변화가 개인화되어가는 사회에 대화를 불어넣어 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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