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고비는 넘겼지만, 또다시 수혈팩을 구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돼요”

빈혈을 앓고 있는 고양이 만두(7)는 9월 13일 간신히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 긴급히 수혈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피를 구하지 못해서다. 혈액은행을 이용해보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혈액은행도 혈액이 부족해 확답을 주지 못했다. 피를 기다리는 동안 만두의 상태는 점점 악화됐다. 보호자는 만두의 피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보호자는 “애를 살려야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없었다”며 “웬만한 커뮤니티에 글을 다 올리고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지인한테까지 물어봤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다행히 만두는 보호자가 커뮤니티에 올린 글을 본 누리꾼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살아났다. 그러나 보호자는 “도움을 주신 덕에 하루 이틀 연명할 수 있는 수치가 되었지만 앞으로의 치료 과정에서 필요한 수혈팩을 구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KB 경영연구소가 발표한 ‘2023 한국 반려동물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반려 인구는 1262만명, 반려 가구 수는 552만에 달한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이들이 늘어가면서 반려동물 의료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자연스레 동물 혈액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지만 혈액 공급량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수의사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따르면 해마다 5만 마리의 동물이 수혈을 받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대학병원·대형병원 등에서 자체적으로 사육하고 있는 공혈견과 민간기업인 ‘한국동물혈액은행’의 공혈견, 공혈묘는 합쳐도 1000마리가 되지 않는다. 나날이 늘어나는 동물 혈액 수요를 1000마리도 채 되지 않는 공혈동물이 오롯이 감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자연스레 공혈동물의 윤리적 문제로 이어진다. 해외의 경우 동물혈액에 대한 법 규정과 공혈동물 사육을 위한 구체적 지침이 있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공혈동물이 언제든 관리 감독의 사각지대에 놓일 수 있는 것이다.

▲ 한국동물혈액은행에서 기르는 공혈견(왼쪽)과 공혈묘(오른쪽)의 모습. (출처=케어 유튜브·카라 홈페이지)
▲ 한국동물혈액은행에서 기르는 공혈견(왼쪽)과 공혈묘(오른쪽)의 모습. (출처=케어 유튜브·카라 홈페이지)

실제로 ‘한국동물혈액은행’이라는 민간업체가 공혈견과 공혈묘를 비윤리적으로 사육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기도 했다. 처음 공혈견과 공혈묘에 대한 처우가 알려지게 된 것은 2015년 동물권단체 ‘케어’와 동물권행동 ‘카라’가 한국동물혈액은행의 공혈견·공혈묘 사육장을 찾아가 실태를 폭로하면서다. 공혈견과 공혈묘를 기르는 민간업체인 한국동물혈액은행은 2002년부터 사업을 시작해 21년 동안 독점적으로 전혈(혈액)과 혈장, 농축적혈구 등을 동물병원에 판매했다. 오늘날 시중 병원에서 사용되는 90%의 혈액은 한국동물혈액은행을 통해 제공받고 있다. 한국동물혈액은행이 운영하는 공혈견 농장은 뜬장에 개들을 가두고 잔반을 먹이로 주는 등 열악한 환경에서 개를 사육하고 있었다. 공혈묘 사육장 역시 전형적인 고양이 번식장의 형태로 대형 매쉬망 케이지 안에 고양이들을 가둔 뒤 사육했다. 폭로가 이어지자 동물혈액은행은 공혈동물의 환경을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는 탓에 지금까지도 어떻게 관리가 이뤄지고 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한국동물혈액은행은 약사법 위반 혐의로 고발돼 검찰에 송치된 상태다. ‘약사법 및 동물용의약품 등 취급 규칙’에 따르면 동물용의약품 판매를 위해서는 검역본부에 동물용의약품 제조업체로 등록하고 적절한 시설과 기구를 갖춘 뒤 제조업 품목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동물혈액은행은 이와 같은 절차를 밟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관할 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 검역본부는 지난해 12월 한국동물혈액은행에게 전혈을 제외한 품목의 판매를 중단하도록 했다.

한국동물혈액은행 사건을 기점으로 공혈동물을 위한 제도적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은 현재 동물혈액과 관련한 법 제도가 미비하다. 2017년 한정애 의원이 동물혈액의 취급 업종을 비롯해 공혈동물의 보호 관리 지침을 규정한 동물보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지만 국회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이후에는 2023년 1월 민홍철 의원이 대표발의한 공혈동물의 채혈 기준을 제한하고 헌혈 문화를 확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동물보호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제출됐다. 2023년 4월에는 동물혈액관리업무를 할 때 장비와 시설을 갖춰 허가를 받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수의사법 일부개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이처럼 지속적으로 공혈동물 관련 법안이 나오고는 있지만, 아직 입법 단계에만 머물러 있어 공혈동물을 위한 법적 가이드라인은 아직 없는 상황이다.

한국과 달리 영국과 미국은 상업적으로 사용되는 공혈동물혈액에 대해 명확한 법 규정을 제시하고 있다. 영국은 수의학제제 규정(Veterinary Medicine Regulations)을 통해 동물혈액의 생물학적 제제를 판매하기 위해서는 국가 승인을 받은 동물혈액은행이 수의사의 책임 아래 법에 명시된 절차에 따라 채혈을 진행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식품농업법(Food and Agricultural Code)에서 동물혈액의 생물학적 제제의 종류에 대해 규정하고 동물혈액은행의 법적 기준을 소개하고 있다. 올해 2월 캘리포니아주 동물보건 및 식품안전부(California Department of Food and Agriculture Animal Health and Food Safety Service)는 동물혈액은행 운영에 관한 보고서를 발간해 채혈 전부터 후까지 어떤 지침에 따라 공혈동물을 관리해야하는지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증가하는 동물 혈액 수요와 공혈동물의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 방안으로 ‘동물 헌혈’이 거론되고 있다. 건국대학교 동물병원과 현대자동차가 함께 운영하는 아시아 최초 반려동물 헌혈센터인 ‘KU 아임도그너 헌혈센터’는 공혈동물의 윤리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기반으로 설립됐다. 한현정 건국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수의응급중환자의학과) 및 KU 아임도그너 헌혈센터 센터장은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혈액을 공혈견을 통한 매혈로 공급받는다”면서 “공혈견의 윤리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많은 헌혈견들의 참여를 유도하여 헌혈을 통한 전국적인 혈액공급이 가능하도록 하는게 센터의 목표”라고 말했다.

▲ 헌혈견 만쥬와 만쥬가 헌혈한 피
▲ 헌혈견 만쥬와 만쥬가 헌혈한 피

만쥬의 보호자 김경아 씨는 열악한 상황에 처한 공혈견을 알게 되면서 헌혈을 결심했다. 만쥬(4)는 올해로 3번째 헌혈을 마친 베테랑 헌혈견이다. 9월 1일 ‘KU 아임도그너 헌혈센터’에서 만난 만쥬는 지금까지 1120mL의 피를 헌혈했다. 검사시간을 제외하고 헌혈에 걸린 시간은 7분 24초. 처음엔 경력견 만쥬도 긴장했는지 헥헥 소리를 냈지만 차츰 의젓하게 앉아 헌혈을 마쳤다. 이날 만쥬는 320mL의 피를 나눴다. 헌혈 직후 의료진은 만쥬의 혈액을 두 팩으로 나눴다. 혈액을 소분해 더 많은 환자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나눠진 혈액 중 한 팩은 만쥬가 병원에 도착하기 전부터 피를 기다리던 동물병원에 바로 보내졌다.

오랜 기간 꾸준히 유기견 보호소 봉사를 다녔다는 김 씨는 보호소 봉사를 하면서 강아지들의 처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던 중 미디어를 통해 평생 철장 안에서 피 뽑히는 공혈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후 그는 관심을 행동으로 옮겼다. 직접 반려견 헌혈이 가능한 병원을 알아봤다는 김 씨는 “만쥬가 나이나 체중 등 헌혈 조건에 모두 해당되더라고요”라며 “만쥬가 더 나이 먹기 전에 헌혈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헌혈을 하게 되면 건강검진도 할 수 있으니까 만쥬는 건강을 체크하고 다른 강아지들에게는 도움을 주고 겸사겸사 좋을 것 같아서 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1년에 KU 아임도그너 헌혈센터를 다녀가는 헌혈견은 약 720여마리. 그럼에도 여전히 혈액은 부족하다. 최희재 KU 아임도그너 헌혈센터 수의사는 이렇게 헌혈을 하는데도 냉장고가 차는 날이 없다고 토로한다. 최 수의사는 피가 항상 모자라고 피가 들어오는 족족 나간다고 설명했다. 그는 “헌혈을 하루에 3건 진행하고 있지만 피 요청 전화는 10건 가까이 온다”며 “하루에 항상 헌혈 3건이 잡혀있는 것도 아니어서 피가 매일 모자란 상태”라고 말했다.

▲ 헌혈을 마친 뒤 기념사진을 찍는 만쥬. 3번째 헌혈을 한 만쥬는 핑크색 스카프와 리시줄을 받았다.
▲ 헌혈을 마친 뒤 기념사진을 찍는 만쥬. 3번째 헌혈을 한 만쥬는 핑크색 스카프와 리시줄을 받았다.

헌혈문화 확산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홍보가 필요하다. KU 아임도그너 헌혈센터는 작년 대비 헌혈 신청자가 2배 가까이 늘었다. SNS를 활발히 운영한 덕도 있지만, 무엇보다 ‘소개’의 힘이 컸다. 반려견 헌혈을 경험한 보호자가 직접 홍보해 반려견의 산책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다. 최 수의사는 “대형견 네트워크가 많은 힘이 된다”며 “헌혈견이 산책을 하면서 알게 된 친구 대형견들에게 헌혈 사실을 알리면서 헌혈 문화가 확산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김 씨 딸의 친구도 만쥬의 헌혈을 계기로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 룰루를 데려와 지난 8월 헌혈에 동참했다. 미디어 역시 반려견 헌혈 문화가 알려지는데 효과적이었다. 실제로 최근 동물농장에서 응급헌혈을 하는 오레오와 정기헌혈을 한 둘리의 장면이 나간 이후 헌혈 문의가 늘었다. 오레오와 둘리를 닮은 대형견이나 오레오와 둘리의 친구들이 헌혈을 신청한 것이다.

헌혈견 1마리에게서 얻은 혈액은 최대 4마리의 개들을 살릴 수 있다. 한 센터장은 “헌혈은 헌혈견이나 혈액을 받는 환자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의료과정”이라며 “헌혈견은 정기적인 혈액검사 등 건강검진 등을 통해 건강을 지켜나갈 수 있고, 무엇보다 내 혈액으로 다른 친구들을 살렸다는 큰 보람을 가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내 반려견이 일생동안 살면서 할 수 있는 가장 가치있는 헌신. 그것이 바로 다른 생명을 살리는 ‘헌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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