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하며 알고 지낸 지 석 달. 동료 여성이 정재윤 씨(27)에게 카카오톡으로 연락했다. 정 씨는 “따로 연락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상대방 여성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연락이 약 3주간 이어지다가 끊길 때까지 정 씨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정 씨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태도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취업준비생 20대 문 모 씨는 2020년 헬스장에서 아르바이트했다. 몸집이 큰 남성이 회원권 등록 절차를 물었다. 남성은 친절하게 상담해서 고맙다며 이름을 알려달라 했다. 이어 지인이 연락이 안 된다며 휴대전화를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문 씨는 자기 휴대전화를 빌려줬다.

악몽이 시작됐다. 1년 간. 남성은 문 씨가 일하지 않는 날에도 헬스장으로 전화했고 아르바이트하는 식당까지 찾아왔다. 문 씨는 그의 보복을 우려해 익명을 요구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국내 스토킹 범죄신고는 해마다 늘었다. 2020년 4515건, 2021년 1만4509건, 2022년 2만9565건.

혼인 건수는 줄었다. 2022년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혼인은 19만 1700건이다. 역대 가장 낮다. 거절했는데도 상대방에게 계속 문자를 받았다는 유지원 씨(24)는 “성숙하지 못한 연애 문화로 인해 스토킹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며 “범죄에 대한 불안감이 연애와 결혼을 힘들게 만든다”고 말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 사랑을 얻기 위한 행위일까, 범죄일까. 4월 22일~5월 19일, 일반인이 스토킹과 구애의 경계를 어떻게 인지하는지 조사했다. 네이버 오피스를 이용해 설문지를 만들고 서울 소재 대학 커뮤니티와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 올렸다. 20~50대 남녀 50명이 답했다.

응답자 대부분은 상대방이 거부해도 계속 다가가는 일이 구애 행위가 아니라고 답변했지만 편지나 선물 전달, 연락에 있어서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응답자 88%가 ‘상대방이 거부 의사를 밝혀도 계속 다가가는 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구애 행위다’라는 문항에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구애 행위를 편지, 선물 전달, 연락 등으로 구체화해 다시 물었더니 결과가 달랐다.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선물, 편지를 주는 건 문제 없다’는 항목에 68%, ‘계속 연락만 하는 정도는 문제 없다’는 항목에 74%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반복되는 구애 행위(고백, 애정 표현 등)와 관련한 질문에 응답자 10.3%가 한 번, 37.9%가 두 번, 32.8%가 세 번까지 괜찮다고 답했다. 이보다 많으면 스토킹으로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응답자 12.1%는 횟수와 상관없이 거부 의사나 구애 행위가 중요하다고 했다.

▲ 서울 용산구 노들섬에서 연인이 노을을 바라본다.
▲ 서울 용산구 노들섬에서 연인이 노을을 바라본다.

대학생 박수빈 씨(24)는 “사람 사귀는데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상대방이 연락하지 말라는 거부 의사를 표현했는데도 집적거리면 스토킹 행위”라고 말했다.

상대방의 일방적인 연락에 불편했던 경험 있냐는 질문에 대학생 김서영 씨(23)는 “원치 않는데 상대가 계속 연락한 경험이 있다”며 “거부하는데도 계속 시도하는 건 불편하다”고 답했다.

1년 넘게 연애 중인 이민상 씨(25)는 “연애하면서 상대방 감정에 더 신경 쓰게 된 것 같다”며 “하지만 상대방보다 본인 의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친구들도 주변에 있다”고 말했다.

대학생 손지혜 씨(24)는 “상대방 집에 무작정 찾아가는 행위를 낭만으로 포장하는 사회가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이를 범죄라고 확실히 인식시키는 사회 역할이 필요하다고 했다. 스토킹 피해를 겪은 문 씨도 “스토킹은 다양한 범죄의 발단”이라며 “수많은 범죄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일반인들의 스토킹 행위 범죄성 인식’에 대해 학술 논문을 쓴 권혜림 서원대 교수(경찰학부)는 서면 인터뷰에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구애고 범죄인지 명확한 구분보다는 모호한 경계선상 그 자체와 가능성에 대해 인식하고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적 경계 인식은 스토킹을 규정짓고 범죄행위로 다루는 기준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권 교수는 사람들이 스토킹 범죄를 모르지 않는데, 문제는 자신이 그 상황에 속하면 판단이 흐려지는 경우라고 짚었다. 스토킹 행위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태도와 신념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성교육 전문가인 배정원 세종대 교수는 “유혹이 없어지는 시대”라며 이렇게 설명했다. “요즘은 남자도 여자도 프로포즈하기 힘들어졌어요. 예전에는 불편하다고 느끼는 데 그쳤지만 이제는 법으로 다루기도 하니까요.”

그는 아이들이 말귀를 알아들을 때부터 ‘성적 동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부모가 어린 아이를 만질 때도 의사를 물어보고 싫다면 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의사를 존중받으며 자란 아이는 자아가 튼튼하다. 자존감이 높아 자신은 물론 남의 권리와 의무를 인정하고 거절도 의연하게 받아들인다. 배 교수는 “인권에 기반한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그리고 관계적 요소를 조화시켜 행복하게 살도록 가르치는 성교육이 한국에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네스코(UNESCO)는 2018년 ‘포괄적 성교육’을 개정하고 발표했다. 데이트, 성 기능 문제, 우정, 폭력을 포괄한다. 섹스(SEX·생물학적 성)는 여기서 일부다.

배 교수는 “유네스코가 각국 문화를 반영해 2035년까지 포괄적 성교육으로 나아가자고 제안했지만 한국에서는 이 교육이 반대에 부딪힌다”고 지적했다. 포괄적 성교육이 성관계를 부추긴다는 이유에서다.

경찰청의 조주은 여성청소년안전기획관은 서면 인터뷰를 통해 “상대방을 존중하는 평등한 의사소통 방식에 대한 교육이 가족, 취학 전 교육기관, 학교, 지역사회, 직장 등에서 전방위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피해자와 상담하고 보호하는 한국여성의전화 최나눔 정책팀장도 전화 인터뷰에서 가해자 처벌과 함께 교육이 동반돼야 한다고 했다. “동의는 상대방을 어떻게 존중하느냐에 기반한다. 교육으로 길러진다면 좋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가해자 중에서도 스토킹 행위를 폭력으로 처벌하는 점을 알면서도 행동하는 사람이 있고, 그런 행동이 용인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부족한 사람도 있다”며 약물, 전자발찌 등으로 제어하는 방법이 능사는 아니라고 했다.

그는 ‘지나친 구애’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지나친 구애, 심한 구애라는 말은 정도가 심하더라도 구애는 구애라고 정당화된다, 평등한 연애, 타인의 경계를 존중하는 구애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2020년 스토킹을 당한 문 씨는 결국 아르바이트 2개를 그만뒀다. 일터에 피해를 주는 것은 물론 생명과 안전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전화번호를 바꾸고 이사도 갔다. 문 씨는 “상대방을 존중하지 못하는 감정 표현은 폭력일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저작권자 © 스토리오브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